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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chcock…서스펜스의 대가, 스릴러 영화 거장

그와 아내 알마 이야기 조명
다시 한번 '히치콕 신화' 완성

히치콕은 영화인들에게 일종의 '신격화'된 이름이다.

서스펜스의 대가 스릴러 영화의 거장이라 불리던 히치콕은 현대 사회가 영화에 요구하는 작품성과 대중성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으며 60여년의 영화 인생을 이어왔고 스토리와 스타일 모두에서 자신만의 주관과 색깔을 뚜렷이 하며 작품 세계를 완성해 왔다. 때문에 사람들은 아직도 끊임없이 그의 영화를 보고 분석하고 공부한다.

그에 비해 히치콕의 개인사는 그다지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편이 아니다. 가정사는 더욱 그렇다. '필름 아이콘'인 그를 두고 부인과의 관계가 어쨌다더라 어떤 갈등이 있었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떠들어대는게 조금은 불경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 개봉한 영화 '히치콕(Hitchcock)'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에 대한 새롭고도 과감한 접근이다. 영화의 핵심은 히치콕 감독과 그의 아내 알마 레빌의 관계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지만 알마 레빌은 평생 히치콕을 옆에서 보필한 현명하고 너그러운 아내이자 히치콕의 가장 훌륭한 영화적 동지이기도 했다. 영화 '히치콕'은 두 사람이 함께 '싸이코'를 만들어내고 성공시킨 과정을 그리며 그 동안 히치콕의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알마 레빌을 재조명하는 작품인 셈이다.

히치콕에게 알마는 그야말로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늘 과체중과 폭음으로 건강에 유의해야 했던 히치콕을 살뜰하게 보필했던 부인 역할은 물론이고 히치콕 영화 대부분의 제작과정에서 크레딧을 밝히지 않은 채 대본집필과 편집에 동참했다. 히치콕이 완성된 영화의 편집본을 가장 먼저 보여주곤 했던 사람도 당연히 알마였다.

'싸이코'를 만들 당시 알마는 히치콕에게 더없이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줬다. 모두가 반대했던 영화의 제작을 응원하며 두 사람의 사재를 모두 털어 영화의 투자하는 것을 허락했다. 원작을 각색하는 데도 앞장서 작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 부부 사이에 약간의 갈등이 있긴 했지만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쓰러져 버린 히치콕을 대신해 현장에 나서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을 진두지휘했다. 처음엔 혹평을 받았던 가편집본을 모두 뜯어고쳐 훨씬 박진감넘치고 무시무시한 영화로 탈바꿈 시킨 것도 알마다. 그 유명한 '싸이코'의 테마음악을 마지막 샤워신에 맞춰 넣은 것도 두 사람이 함께 둔 '신의 한 수'였다. 개봉 첫 주 극장을 잡지 못해 흥행에 참패할 위기에 놓였을 때 관객들의 공포를 극대화시키고 빠르게 입소문이 날 수 있도록 영리한 마케팅 전략을 세웠던 것 역시 알마 레빌이 곁에 없었다면 이뤄내지 못했을 히치콕의 성공 신화다.

그러니 영화 '히치콕'을 통해 히치콕 감독과 '싸이코'가 다시 한번 대중에 회자되고 그의 부인 알마 레빌까지 재조명되는 것은 영화팬들에게 더할나위 없이 좋은 서비스다. 영화 속에서 각각 히치콕과 알마 역을 맡은 두 아카데미 수상경력의 배우 앤소니 홉킨스와 헬렌 미렌 역시 그들의 신화에 걸맞는 명분장 명연으로 또 하나의 '히치콕 신화'를 완성시킨다. 알수록 흥미롭고 가까워질수록 위대해지는 이름이 바로 알프레드 히치콕이다. '히치콕'은 그래서 더욱 반가운 선물같은 영화다.

60년 영화 인생…그는 천재이기보다 성실한 감독 이었다



히치콕은 60여년 동안 약 50여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1939년까지 영국에서 활동하며 만든 영화가 26편, 나머지는 이후 할리우드로 건너와서 만든 영화들이었다. 물론 이 가운데는 엄청난 대중의 사랑과 평단의 극찬을 받은 작품이 있는가 하면, 제작사와 갈등을 빚으며 작품의 완성도와 흥행에서마저 그다지 좋은 결과를 얻어내지 못한 영화도 꽤 있다. 하지만 히치콕은 어떤 상황에서건 새로운 영화 만들기를 멈추지 않았고 늘 메가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참 성실한 영화 인생이었던 셈이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긴 히치콕표 영화들의 성공요인은 어쩌면 그의 천재성보다 그 성실함에서부터 비롯됐을지도 모른다.

최근 영화비평사이트인 로튼토마토닷컴과 영화데이터베이스사이트인 IMDB는 히치콕의 영화들을 다각도로 평가해 종합 순위를 매겨 화제를 모았다. 평가 항목으로는 인플레이션을 감안해 현재 달러 가치로 환원한 흥행 성적과 비평가·대중들의 평점, 아카데미 후보 지명과 수상 성적 등이 포함돼 있다. 이 결과, 히치콕 영화 가운데서도 최고로 꼽힌 작품은 '레베카'다. 이 작품은 1940년 할리우드로 건너온 히치콕 감독이 미국에서 만든 첫 영화이자 그에게 처음으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르는 영예를 안겨줬던 작품이기도 하다. 비록 감독상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히치콕은 '레베카'를 통해 그해 아카데미에서 11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작품상과 촬영상 2개의 상패를 거머쥐었다.

2위는 1954년 작인 '이창'이다. 망원경으로 이웃들을 훔쳐보는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에피소드를 담은 '이창'은 비평가와 대중들의 평점 면에서는 오히려 '레베카'보다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히치콕 필모그래피 최고의 흥행작이자 영화사 최고의 스릴러 걸작으로 꼽히는 '싸이코'는 3위에 올랐다.

히치콕과 그의 기록들
배우들 위에 서서 군림하던 '제왕적 감독'


1. 히치콕은 배우들을 소(Cattle)에 비유하곤 할 만큼 그들 위에 서서 군림하는 제왕적 감독이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와 같은 태도와 'Cattle 발언' 에 대해 비난 받자 "난 모든 배우가 다 '소'라고 말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배우들은 모두 소처럼 다뤄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다"라고 얘기해 또 한번 할리우드를 발칵 뒤집었다.

2. 히치콕은 '맥거핀' 기법의 추종자였다. 맥거핀이란 영화의 플롯 진행에 있어서 특정한 내용이나 인물에 관해 관객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내용상 무언가 중요한것임을 암시하지만 실상은 플롯의 진행에 있어 아무런 관련성도 없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히치콕은 맥거핀을 관객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하나의 방법으로 즐겨 사용하였다.

3. 히치콕은 자신의 영화에 카메오로 즐겨 등장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영화 속 등장한 그것을 찾는 것 또한 한 재미가 된다. 영화의 등장방법은 지나가는 행인이나 버스를 기다리는 시민 등 다양하며 때로는 영화속 신문기사에 등장하기도 한다.

4. 히치콕은 '레베카' '스펠바운드' '구명보트' '싸이코' 그리고 '이창'으로 총 다섯 차례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올랐지만 단 한 번도 수상에 성공하지 못했다. 대신 1968년 아카데미로부터 특별상을 받았다.

5. 히치콕이 가장 아꼈던 배우로는 '서스픽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등 4편의 작품에 출연한 캐리 그랜트와 '이창' '현기증' 등 다른 4편에 출연한 제임스 스튜어트가 있다. '다이얼 M을 돌려라' 등 3편에 출연했던 그레이스 켈리 역시 그가 아끼는 배우로 히치콕은 그녀의 은퇴 후에도 꾸준히 컴백을 권하며 러브콜을 보냈다고 한다.

영화 '싸이코'의 제작 뒷 이야기
80만달러로 30일만에 완성


영화 '히치콕'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과 그의 부인 알마가 영화 '싸이코'를 만드는 과정을 담고 있다. 원작도 '알프레드 히치콕과 싸이코 제작(Alfred Hitchcock and The Making of Psycho)'라는 책이다. 영화와 책에서 소개된 '싸이코' 제작 과정에 담겨 있는 뒷 이야기들을 모아봤다.
- 히치콕은 영화 '싸이코'를 제작비 80만달러로 30일 만에 완성했다.
- 히치콕의 홈 스튜디오로 그와 늘 함께 영화 작업을 해 오던 파라마운트사는 '싸이코'의 제작을 애초부터 거부했다. 이에 히치콕은 영화 제작비를 자체 충당하기로 결심하고 모든 재산을 끌어모아 영화에 '올인'했다. 후에 그의 에이전트였던 류 워서맨은 파라마운트사와 유리한 배급계약을 끌어내 영화의 대성공 후 히치콕이 엄청난 수익을 가져갈 수 있게 도왔다.
- '싸이코'를 흑백으로 만들자고 제안한 것은 그의 부인 알마 였다. 흑백화면으로 잔혹한 장면을 덜 자극적으로 보이게 해 심의통과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 당시 '싸이코'는 첫 심의과정에서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두 장면이었다. 여주인공이 파격적 속옷 차림으로 등장하는 오프닝신과 영화사 최초로 극 중 중요한 장면에 변기에 물이 내려가는 모습을 담은 장면이었다.
- 이후 그 유명한 샤워 살인 장면이 문제가 된 것은 물론이다. 심의를 담당하는 프로덕션 코드측은 히치콕에게 영화를 재편집 해오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본편집본 그대로 다시 돌려보내는 배포를 자랑하기도 했다.
- '싸이코'는 히치콕의 전작이었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보다 2.5배 높은 수입을 올렸다. 이 영화로 히치콕은 생애 다섯번째이자 마지막이었던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르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수상에는 실패했다.
이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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