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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시일반’의 정성이 얼어붙은 세상을 따스히 녹였다.

Toronto

2013.01.16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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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양식 나누기’ 배달봉사 동행 취재
12월 15일(토요일)
오전 10:00

평상시 토요일 같으면 이불 속에서 뒤척거리며 뜸들이고 있을 시간이건만, 오늘은 여느때와 달리 눈을 뜨는 순간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군대시절 “기상!” 이라는 불침번의 구령에 벌떡 일어나던 쫄병처럼.. ‘사랑의 양식 나누기’ 운동에 동행 취재하기로 약속한 날이기 때문이다. 11시반까지 김동욱 한인사회봉사회(이사장 이정열) 사무장이 목회하고 있는 큰나무교회로 가야만 했다. 다행히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기 때문에 그나마 덜 쫓기는 마음이 들었다. 일주일동안 집안일에 매달린 아내의 수고를 덜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봤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강아지를 돌봐주고 장인어른 목욕 시키는 데만 1시간이 걸렸다. 주말이면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 건지.. 설겆이까지 도와주고 나니까 내몸 씻을 시간도 모자랐다. 대충 비누질하고 물 끼얹고 머리를 말릴 시간도 모자라 허둥지둥 집을 나서는데 잔뜩 구름에 덮힌 하늘이 당장이라도 눈을 쏟아부을 것만 같았다.

오전 11:33

커머길을 따라 부리나케 큰나무교회로 달려갔다. 난생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러 간다는 뿌듯함 때문이지 아담하게 생긴 큰나무 교회가 오늘따라 하얀 눈을 소복이 입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뒷마당 한쪽 켠에 가지런히 쌓아놓은 빛바랜 땔나무들이 세월의 풍상을 나무결 사이마다 켜켜이 껴안은채 오래도록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뒷마당을 한바퀴 구경하고 있자니 어느새 김동욱 목사가 문을 빼곰히 밀고 나오는 모습이 영락없이 훈훈한 목사님이다. 두툼한 겨울 모자를 뒤집어 쓰고 나오더니 음료수 한개를 건네줬다. 나도 사과쥬스와 물 한병 가져왔는데 그가 먼저 음료수를 건네니 여간 겸연쩍은게 아니다. 먼저 남에게 자기 것을 내어주는 습관이 몸에 배지 않고는 쉽게 나올 수 없는 행동으로 여겨졌다. 오늘 하루는 참 뜻깊은 동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오래전 한국가수 최성수가 부른 ‘동행’이라는 노래가 나도 모르게 콧구멍을 타고 흥얼거리며 흘러나왔다.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 줄 사람 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왠지 모르게 목사와 동행하는 길은 참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내 선입견은 김목사와 알고 지내는 시간이 차츰 쌓여가면서 여지없이 깨지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시골 골목대장 형과 함께 들판을 누비고 다니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나는 오늘 관념적인 인생론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삶의 여정을 직접 보고 만져보는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

오전 11:45

‘사랑의 양식 나누기’는 한 가정당 쌀 한포대(20파운드)와 라면 두상자, 1kg짜리 고추장과 된장을 한통씩을 나눠준다. 가까운 곳부터 순로를 따라 최대한 동선을 짧게 그리며 배달을 하는 일정이 빼곡하게 짜여져 있다. 여러 사람의 자원봉사자들이 1천여 가정을 나눠서 동시에 1개월 동안 배달에 들어가기 때문에 상당히 치밀한 계획과 준비가 필요한 사역이다. 오늘 김목사와 내가 맡은 구역은 5 가정 밖에 안되지만 거리는 굉장히 멀리 퍼져있어 김목사 차가 기름값 꽤나 먹게 생겼다.

정오 12:00

“12시에 만나요!”라고 김목사가 첫 수혜자에게 전화로 말한 바로 그곳에 정확하게 12시에 도착했다. 노스욕 영 선상에 자리잡은 비교적 깨끗한 아파트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수혜자 할아버지가 나오질 않았다. 이상한 생각에 아파트 로비에 들어가서 경비에게 물으니 다른 입구는 없다고 그랬다. 하도 안 나오니 경비와 함께 10층까지 올라가서 해당 호수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왠걸,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엉뚱하게도 동남아 사람이었다. 김목사가 찬찬히 수혜자 목록을 들여다보니, 아뿔싸! 번지수를 잘못 알았던 것이다. 2065번지 아파트를 2095번지 아파트에서 찾았으니… 수혜자 할아버지는 셀폰이 없는데 큰일이다. 벌써 30분이 지났는데 기다리다 지쳐 다시 올라갔는지도 몰랐다. 차를 몰아 2065번지 아파트로 들어갔다. 현관 입구나 로비에 할아버지가 안보였다. 시간이 촉박해 다음 코스 먼저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차를 돌려나오는데 할아버지가 영 선상 입구에서 추위에 덜덜 떨며 여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었지만 할 수 없었다. 왠만하면 할아버지 집에 사랑의 양식을 부리고 나오면 되겠건만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이 일터 시간에 쫓기는 사람이라서 할 수 없이 할아버지는 집에 일단 들어가 계시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르겠다는 말을 남기고… 30분 이상 길바닥에서 오지 않는 사랑의 양식 배달차를 기다리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서글펐을까 생각에 미치자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오후 12:30

할아버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번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허름한 아파트가 눈에 띄었다. 유난히 한인들이 많이 산다는 아파트. 여기가 좋아서 많이 사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없어 할 수 없이 이곳에 모여 사는 것이다. 수많은 사연들이 이곳에 얽혀 있고 눈물이 고여 있으리라. 엘리베터 문이 열리고 가냘프고 착하게 생긴 여자 아이가 추리닝 차림으로 나왔다. 보는 순간 가슴이 멍해지면서 물기를 잔뜩 머금은 스폰지 하나가 생기는 느낌이 밀려들어왔다. 혼자 물건을 다 들 수 없기에 김목사와 내가 앨리베이터까지 들어줬다. “부모님은 집에 계시니?”라고 대뜸 물어보았다. 어린 여학생이 “없어요.” 라고 힘없이 답했다. “아빠는 어디 계시니?” “아빠 안 계세요..” “그럼 엄마는 어디에 계시니?” “엄마는 일 나갔어요..”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밝게 웃지만 그 큰 눈망울 속으로 깊은 슬픔의 심연이 들여다보이는 것만 같아 눈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엘레베이터 문이 스스르 열렸다. 집까지 따라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사랑의 양식과 함께 “잘 지내요…”라는 말을 엘레베이터에 밀어넣었다. 닫히는 엘레베이터 문 틈으로 새어나온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라는 말이 귓전을 때린 후 한동안 귓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어린 여학생은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이라고 한다. 여느 평범한 아이들 같으면 주말에 부모님과 함께 성탄절을 맞이해 외식을 하거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정상인데 그 애는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추운 겨울 주말에 집에서 쉬지도 못하고 삶을 위해 직업 전선에 나선 어미의 깊은 슬픔이 전해져 왔다. 낯선 외국땅에서 어린 자녀와 홀로 사는 한국 여인네의 피맺힌 삶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어떤 기구한 사연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냉혹한 현실에서 그녀가 지탱해야만 하는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어린 딸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까왔다.

오후 1:00

지프차를 몰고 401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나는 김목사에게 “참다운 삶이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모두가 부둥켜 안고 살 수 있는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졌다. 의외로 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나는 고상하고 철학적인 답변을 기대했는데… 그는 “내가 가질 몫을 조금만 내놓으면 된다.”는 것이다. “부자가 많이 내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가난한 사람들이 조금씩 더 가난해지면 가난 때문에 죽는 사람을 살릴 수 있다.” 차창 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기는데 전기줄에 참새들이 엄청 몰려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그런데 문득 건너편 전기줄에 참새 한마리가 외로이 홀로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박혔다. 가난한 자의 마음은 저 외로운 참새와 같은 심정이 아닐지… 어느덧 차는 제인과 에글린턴 근처의 어떤 아파트로 들어갔다. 아까 봤던 아파트보다 더 허름해보였다. 여긴 도대체 어떤 아파트인지.. 김목사가 말하길 이 아파트는 쉘터(피난처)로 이용되는 곳이라고 그랬다. 아파트 모서리 입구에 도착하니 유리문 안쪽에서 어떤 여인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예정된 시간인 12시 반보다 30분이나 늦었는데 거기에 그대로 서 있었던 것이다. 이 여인도 셀폰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유리문 안에서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며 사랑의 양식이 오기를 기다리는 그 여인의 모습에서 희망과 함께 절망을 읽었다. 금새라도 눈물이 뚝 떨어질 것 같은 여인의 모습에서 혹시나 내가 갑자기 죽어버린다면 세상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아내가 저런 눈망울로 우두커니 서있을 꺼라는 상상을 하니 도무지 마음이 미어터질 것만 같아 목이 메었다. “안녕하세요?”라는 말과 함께 물건을 건네는데, 내 어깨에 걸린 카메라를 보자 가여운 여인은 기겁을 하고 얼른 물건만 낚아채고 총총 걸음을 재촉하며 돌아섰다. “고맙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어찌나 미안했던지 카메라를 메고 내린 내 자신이 한없이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김목사가 들려준 이야기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쉘터에 오는 여인은 말 그대로 무일푼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소득도 없고 식량도 없다. 비록 캐나다 정부가 그런사람들을 위해 긴급 피난처를 제공하고 있지만 여인이 느끼는 비참한 생활을 구원해주지는 않는다. 만일 내 가족 부모형제 중 누군가가 이렇게 삶의 벼랑 끝에서 울고 서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쉘터의 여인’에게 우산을 씌워줄 수 있는 사랑이 필요한 것 같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이 오는데 각 종교단체에서는 뮤지컬이다 파티다 해서 너도 나도 이웃을 향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곁에는 의외로 쌀 한가마니, 라면 두박스 그리고 고추장 된장 한통을 받기 위해 무작정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뮤지컬에 갈 힘도 돈도 없는 가엾은 한인들의 한숨 소리가 어디에서 들리는지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오후 1:30

우리의 실수로 정오에 사랑의 양식을 전달받지 못하고 돌아간 할아버지 아파트에 다시 도착했다.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할아버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다. 아들집에 얹혀 산다는 할아버지는 카메라에 포즈까지 취했다.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할아버지의 솔직함 속에는 험난한 세파를 헤치고 지나온 노인의 안온함이 묻어있었다.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할아버지에게서 가식적인 위선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후 2:30

큰나무교회 권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간단히 백반으로 점심을 때운 다음 우리는 페어뷰몰 근처에 있는 아파트를 찾아갔다. 이 아파트도 남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부자들이 늘어나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가난한 사람들이 낡은 아파트를 찾아 몰려들고 있다. 아파트에 번지수가 떨어져서 보이지 않았다. 하얀 외투를 입은 여인이 현관에서 기다리다가 우리 차를 보자 주변을 살피며 나왔다. 매우 조심스러운 그녀의 마음을 다칠까봐 나는 창문만 내린채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가까이 온 여인이 사랑의 양식을 장바구니 카트에 담아 떠나려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말을 건네자 여인이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허리를 굽히며 정중히 인사했다. 곱게 빗어내린 머릿결 사이로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여인의 눈매가 유난히 착하디 착한 요조숙녀의 모습이었다. 젊었을 적 상당히 예뻤으리라 짐작되는 여인의 이마에 서린 주름살에 한이 땀땀이 맺혀있는 것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분명 여인은 혼자 살고 있으리라. 남편이 있다면 몸소 내려왔을 터인데 그들은 어디에 가고 없는 건지…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통은 나누면 반으로 준다.”는 말이 오늘처럼 절실하게 다가온 적도 없다.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랑이 너무나 그리운 시간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오후 3:00

오늘의 마지막 행선지는 빅토리아 애비뉴를 따라 댄포드 애비뉴 근처까지 내려가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숲속 언덕에 자리잡은 40층 짜리 서민 아파트였다. 그곳에 사는 노부부 중 남편이 대로까지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30년 가까이 남의 세탁소에서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았는데 얼마전 세탁소가 팔리는 바람에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다고 한다. 정식 고용계약을 체결한 것도 아니니 실업수당도 없고, 연금을 받을 나이에는 아직 모자라다 보니 무일푼으로 생계가 막막해진 경우다. 늙었다고 취직도 안되니 그저 앞길이 막막할 뿐인 노부부. 행여나 이름이 알려질까봐 전전긍긍하며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하는 모습이 꼭 우리 부모님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애써 유쾌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노부부는 돌아서는 김목사에게 고맙다며 김 한 다발을 건네줬다. 참으로 오묘한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사랑의 양식을 지원받아 살아야만 하는 노부부가 도리어 보은의 정성으로 김을 선물하다니… 없는 사람이 베푸는 선물은 대단한 의미로 다가왔다. 사랑은 꼭 물질의 크기만으로 전달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그들 노부부는 영어를 못하는지 김목사에게 다음에 병원갈 때 통역을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김목사는 흔쾌히 그 부탁을 들어줬다. 굉장한 신뢰와 보살핌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장면이었다. 노부부의 배웅을 뒤로하고 우리는 하루일과를 마무리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후 3:40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김목사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세상에는 우리가 살면서 보통은 겪지 않는 생존의 위협에 매일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벼랑 끝에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삶을 부여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결코 남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 만은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 그들도 한때는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살며 단란한 가정의 행복을 노래했던 사람들이다. 불행은 갑자기 닥쳐오며 그것도 한꺼번에 몰려오는 경향이 있다. 이들에게 닥친 불행은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 불행은 대부분 인간적으로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어 보인다. 다운타운에 있는 온타리오미술관에 우연히 가 본 적이 있다. 그곳 어느 코너에 유명한 화가가 그린 “가난은 폭력이다.”(Poverty is violence.)라는 제목의 그림이 걸려있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렇다. 폭력 중에서도 가난이 주는 폭력은 무지막지하다 못해 무자비하다. 가난한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삶의 무게가 짓누르는 고통을 고스란히 머리에 이고 산다. 그 무게가 주는 고통이 얼마나 신산(辛酸)한지 절로 스며나오는 눈물이 금새 눈알을 덮으며 시야를 가린다. “모든 인생은 평등하다.”는데 현실에서는 결코 평등하지 않은 삶들을 보게 된다. 콩 한쪽도 나눠 먹는 미풍양속을 자랑하던 한국인은 언제부턴가 나누는 것에 인색한 사람들로 변해가고 있다. 정많고 눈물많던 한국인들이 지금은 기부지수 세계 81위라는 부끄러운 자화상을 드러내고 있다. 내 밥그릇을 나눠먹는 마음이 절실한 겨울이다. '나눈다'는 건 내 몫을 떼어내 주는 것. 나눌 수 있는 건 돈만이 아니다. 시간과 정성을 쪼개서 힘든 사람과 발목을 함께 묶고 걸어줄 수 있다면 그게 진정한 나눔일 꺼라는 생각이 든다. 내 코가 석자라고 아직 기부 한번 하지 못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돌아오는 길에 김목사가 아까 받은 김 뭉치를 내게 건네줬다. 안받는다고 실갱이하다가 떼밀다시피 안겨주는 김뭉치를 받아들었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준 김뭉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동에 그 자리에 못박힌채 움직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시동을 걸고 작별인사를 하는데 김목사가 차창 안으로 겨울용 장갑을 집어넣어 줬다. 내가 끼고 간 장갑이 짝이 안맞는 낡은 것을 보고 가만 있지 못하는 그의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져 왔다. 코끝이 찡해졌다. 나는 잔뜩 찌푸린 하늘을 흘깃 쳐다보고 콧노래를 다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사랑하고 싶어요 빈 가슴 채울 때까~~ 사랑하고 싶어요 살아 있는 날까지~~” ‘동행’ 노래가사의 끝 소절이 하루종일 아코디언으로 변한 가슴에서 애틋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성진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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