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뜻으로 '배은망덕(背恩忘德)'을 사용한다. 배은망덕한 짓이 도덕과 윤리로 비교적 무장된 국민이 살고 있는 선진국에서는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나를 무색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2008년 미국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았던 AIG가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보도다. 사건의 뿌리를 훑어보자. 굴지의 미국 보험회사인 AIG는 평범한 회사였다. 브롱스에서 태어나 2차 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용사인 행크 그린버그가 1968년 이 보험회사에 입사한 후, 급속하게 성장했다.
행크 그린버그는 5년 전인 2008년, 스스로 믿을 수 없는 거액의 보험금을 지급해야 할 위기에 몰리자 미국 정부에게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미국 정부가 AIG에 지원한 구제금융 금액은 무려 1820억 달러다. 물론 당시 전세계 130국에 300개의 자회사를 둔 거대 보험금융 그룹이었기 때문에 원금 회수에는 별 문제가 없다는 판단을 했을 것 같다.
최근 AIG의 TV선전 광고를 보면 원금 전액과 이자 220억 달러를 미국 정부에 갚았다. 즉 미국 정부는 구제 금융지원으로 인한 손실은 없는 셈이다. 상환능력 여부를 떠나서 2008년 당시 부시 정부의 재무장관인 행크 폴슨이 은행이 아닌 민간 보험회사를 구제하기로 결정했을 때, 대부분의 미국인은 의아해했다. 왜 보험회사인가. 보험회사가 미국 자본주의 금융시스템 붕괴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문제의 발단은 파생금융상품인 '크레딧 디폴트 스왑'이라는 괴물에서 출발한다. 이 상품은 스왑이라는 이름은 붙었지만, 사실 보험상품이다. 당시 채권을 사고 만약 그 채권을 발행한 회사가 파산하면 원금을 물어주겠다는 보험상품이라는 얘기다.
그러면 왜 스왑이라는 명칭이 붙었는가. 스왑은 파생금융상품을 말한다. 파생상품은 규제가 없다. 반면 보험이라면 일정액의 준비금도 쌓아야 하고 당국으로부터 감독을 받아야 한다. 이 규제를 피하기 위해 기발한 착상이 바로 CDS(Credit default swap)의 탄생 비밀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부실화 되자 이를 잘게 자르고 섞어 만든 '모기지 증권'과 CDS를 샀던 투자은행과 상업은행들이 이 CDS를 판 AIG에게 '부도 났으니 원금을 달라'고 청구를 했다. 청구금액은 도저히 AIG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거금이었다. 결국 미국 정부에게 구조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보험금을 받은 금융기관이 골드먼삭스, 도이치뱅크 등이었다. 묘하게도 그 당시 행크 폴슨 재무장관은 골드먼삭스 출신이었다.
그 결과 평생 열정을 바쳐 보험 금융그룹을 일구었던 행크 그린버그는 이 회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사건의 개요가 이러하다면,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당시 잘 나가던 이 보험그룹이 파생금융상품을 만들고 파는 비즈니스에 왜 뛰어 들었냐는 의문이다.
한편,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70년대 '정크본드의 왕'인 마이클 밀켄과 함께 드럭셀번햄이라는 증권회사에 근무했던 하워드 소신이라는 사람이 있다. 드럭셀번햄 증권회사가 파산하자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에서 교수를 하고 있던 그는 어느 상원의원의 소개로 그린버그를 만나게 된다.
평소 AIG같은 신용등급이 최상인 금융기관을 활용해 월가에서 비즈니스 하기를 소망했던 그는 바로 자신의 꿈에 맞는 그린버그를 만나 의기투합, 1987년 AIG-FP라는 금융회사를 자회사로 설립한다. 지분비율은 AIG가 80%, 소신이 20%였다. 처음 6개월간 이 자회사는 무려 6000만 달러라는 거금의 수익을 올렸다.
그린버그의 두 눈은 휘둥그래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자회사가 만들고 판 파생금융상품이 문제의 '크레딧 디폴트 스왑'이다. 거인의 몰락을 자초했던 그 괴물이었다. 한국 속담에 '송충이는 솔잎만 먹어야 한다'는 경구가 있다. 그린버그도 솔잎만 먹었더라면 보험업계의 전설로 남았겠지만,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욕심 내지 자만심이 결국 파멸시켰다.
보도에 따르면, 소송의 이유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조건을 강요했다'는 취지다. 즉 구제금융을 지원받으면서 정부의 안대로 그대로 따랐다는 얘기다. 소송 사건이 최근 보도되자 비난의 화살이 AIG에게 쏟아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새로 임명된 경영진은 이 소송에서 발을 빼겠다고 했다. 신임 경영진들은 미국인의 비난을 감당할 수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모든 원금과 이자를 상환하고 난 후,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 이 보험그룹은 다시 후진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아무튼 그린버그는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다. 90세 가까운 나이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의 심정은 정말 얼마나 답답할까. 그렇다고 배은망덕이라는 칼을 빼든 것은 좀 심한 노욕이 아닐까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