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소설 출판 100주년 마르셀 프루스트의 방대한 '시간' 파노라마 4월 28일까지 맨해튼 모건 라이브러리 전시
'기력이 빠진 나는 마지못해 입을 열고 마들렌을 적신 차를 조금 맛보았다. 케이크 부스러기가 섞인 따뜻한 차가 입천장에 닿자마자 나는 이내 몸서리쳤다… 뭐라고 형용키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외따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휩쓸었다… 그러자,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이 맛, 그것은 콩브레 시절의 주일날 아침, 내가 레오니 고모의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 고모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꽃을 달인 물을 담근 후 내게 주던 그 마들렌 작은 조각의 맛이었다.'
'마들렌(Madeleine·조가비 모양 과자)'과 함께 까마득히 잊고 있던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주인공. 이 이야기를 '한국식'으로 바꾸면 어떤 것이 될까. 차창 밖에서 확 밀려오는 짠 바닷물 냄새에 문득 고향이 떠오르며 젊은 시절 바닷가에서 몰래 즐겼던 데이트가 갑자기 생각난다든지, 아니면 부엌에서 솔솔 풍기는 김밥 냄새에 불현듯 학교 소풍날 짝사랑하던 담임 선생님을 위해서 어머니를 졸라 특별히 김밥 한 통 더 챙기던 추억이 떠오른다든지.
과거에 맡았던 특정한 냄새에 자극 받아 기억이 떠오르는 일을 부르는 말, 바로 '프루스트 현상'이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1871~1922)가 전 생애에 걸쳐 쓴 대작,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등장한 이 마들렌(Madeleine)' 대목 때문에 생긴 말이다.
프랑스 작가 앙드레 모루아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만이 있다." 물론 읽지 않은 사람이 더 많겠지만 그만큼 이 소설이 문학을 비롯한 예술 전 영역에 걸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일 것. 명작이라는 것을 알아도 '양이 너무 많아서' 읽다가 중단하고, 다시 시작하고 실패하기를 반복하게 되는 방대한 소설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완독에 성공한 사람들 보다는 일부 부분을 통해 프루스트의 한 조각만을 맛본 사람들이 대다수다.
그러나 그의 조각이라도 맛 볼 수 있는 게 어딘가. 더군다나 올해는 소설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다. 이를 기념해 맨해튼에 있는 모건 라이브러리는 '마르셀 프루스트와 스완네 집 쪽: 100주년(Marcel Proust and Swann's Way: 100th Anniversary)' 전시를 준비했다. 사실 전시 자체는 특별할 게 없다. 조그만 방을 연상시키는 전시실 안에는 프루스트와 그와 함께 하던 사교계 인물들, 가족들의 사진이 있다. 그리고 프루스트의 필체를 확인할 수 있는 수많은 노트들, 길고 가느다란 글씨로 빼곡하게 무언가를 적어 내려간 그의 집념을 볼 수 있다. 조금 남은 여백에 그가 그린 크로키 그림을 보면서 프루스트의 미적 감각을 살짝 엿볼 수도. 이 모든 것은 프루스트 삶 속 기억을 기초로 한 작품이다. 프루스트와 그의 작품에 대해 조금 더 탐구해 보면 전시 속에서 무한한 '기억의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작가에겐 상상이란 없다. 단지 기억만으로 글을 쓴다"고 했던 프루스트의 말처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은 20세기 전반 소설 중 그 질과 양에 있어 최고라는 찬사를 받는다. 소설의 형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소설의 기본 원칙들을 파괴한 작품이라고 평가 한다. 의식이 흐르는 대로 서술한 점과 시각·후각·청각 등 여러 감각이 교란된 것.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다뤘다는 점. 지금까지도 여러 글에서 프루스트와 그의 소설이 인용되는 이유가 아닐까.
프루스트는 종종 자신의 작품을 '대성당'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만큼 잘 건축된 작품이고, 틈새 하나, 기둥 하나, 장식 하나 어긋나는 것이 없다. 작품의 배경도 19세기부터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는 시기까지를 아우르고 있을뿐더러, 주요 인물만 해도 500여 명에 이른다. 스케일도 크지만, 더욱 흥미로운 부분은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종합 예술성'이다. 1909년 구상 단계부터 무려 19년 동안 이어진 프루스트의 지휘 아래, 소설 속 배경과 캐릭터들은 문학·철학·미술·음악의 시간 속에서 춤을 춘다.
◆프루스트, 그리고 음악='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권, '스완네 집 쪽'에서 마들렌 과자를 먹은 뒤 과거의 기억에 폭풍처럼 휩싸이는 주인공을 묘사했다면, 2부 '스완의 사랑'에서는 음악이 기억의 매개체가 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작곡가 '뱅퇴유'가 만든 소나타가 무의식 속 기억을 다시 끄집어 낸다.
프루스트는 음악과 관련된 교육을 많이 받았다. 전문가 못지 않게 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집의 한 공간을 음악홀로 꾸며 음악회를 열었다. 프루스트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피아니스트였고 프루스트 본인도 피아노를 잘 쳤다. 가족 중 한 명은 쇼팽에게 레슨을 받았던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프루스트는 바그너도 좋아했지만 낭만주의 작곡가들, 특히 베토벤을 사랑했다고 한다. 소설 한 부분에서 프루스트는 등장 인물들의 대화를 베토벤 현악 4중주에 비유하는 등 소설 전반에 걸쳐 음악적인 요소가 등장한다.
◆프루스트, 그리고 미술=프루스트는 그림을 사랑했고 많은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작품을 산 적은 한 번도 없다. 소설에는 가상의 화가, 엘스티르가 등장하는데, 이는 제임스 휘슬러·모네·르누아르 등 화가들의 조각을 엮어 만들어진 인물이라고 한다. 반듯한 인상에 흰 수염, 허공을 바라보는 시선 등 엘스티르를 묘사한 대목에서는 모네가 떠오르며, 그림을 그릴 때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인상에 충실하게 그리는 모습에서는 르누아르가 떠오른다.
소설에 등장하는 화가·예술가만 해도 100명이 넘는다. 휘슬러, 벨리니, 베르메르, 렘브란트 등… 얀 베르메르의 '델프트 풍경(1659~1660)', 렘브란트의 '야간 순찰(1642)' 등 작품을 묘사하는 듯한 대목도 있다.
◆프루스트, 그리고 영화=영문소설은 4000페이지에 이른다.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양이다. 그러나 폴커 슐렌도르프 감독은 '잃어버린 시간…'의 1부만 영화화 해 영화 '스완의 사랑(Swann in Love· 1984)'을 만들었다. 제레미 아이언스가 '스완'을 연기하는 이 영화는 소설 내용 일부를 110분에 담았다. 이 밖에도 'Time Regained(2000)',' Quartetto Basileus(1982)' 등이 있다.
그러나 꼭 책이 영화로 재탄생하지 않았더라도 프루스트 소설은 여러 영화에서 중요한 등장 요소로 사용되며 식지 않는 인기를 자랑한다. '오겡끼데스까~'라는 대사로 유명한 일본영화 '러브레터(1995)'에서 소년이 소녀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러브레터가 바로 이 책. 또 영화 '훌리오와 에밀리아(2011)'에서도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두 주인공이 프루스트 책에 빠져 사랑을 더욱 키우는 장면도 나온다. 영화는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등장한 대사 "어쩌면 10년 후에 우연히 마들렌을 먹다가 오늘이 기억날지도 모르지"를 통해 프루스트 소설이 더욱 주목을 받았다.
전시는 4월 28일까지. The Morgan Library· 225 Madison Ave@36th St. 입장료 15달러. 212-685-0008. www.themorga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