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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대륙횡단 수기공모 당선작] 장미 언덕에서 남편을 다시보다

Los Angeles

2013.04.1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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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영아
1

오늘은 내 남편, 그분의 85 세 생일이다. 내가 운전을 할 수 없으니까 매 년 아들과 며느리가 동행해 준다.
장미 언덕 밑에서 장미 서른 송이를 샀다.
“왜 서른 송이를 사세요?”
아들이 묻는다.
“금년이 네 아버지 떠나신 지 30 년째 되는 생신이지 않니?”
아들은 작년 이맘때에 29 송이를 샀던 일을 벌써 잊었나 보다.
“아, 그렇지!”
아들은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우리 남은 가족은 남편의 기일보다도 생일을 기념한다. 기일은 슬픈 기억뿐이지만, 그분의 생일에는 온 식구가 즐겁게 축하해 드리던 많은 아름다운 추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5월의 햇빛은 맑고 따뜻하다. 장미언덕 공동묘지(Rose Hill Memorial Park)는 항상 잔디가 푸르다. 넓은 동산에는 고인들의 넋을 기리고 돌아간 흔적들이 이곳저곳에 꽃으로 남아있다. 오늘도 장례 행렬이 두 곳이나 눈에 띈다. ‘작별’이란 얼마나 마음 아프고 힘든 일인가! 그러나, 고인에 대한 정은 가족의 마음 속에 영원히 담겨 있는 것이다.
아들이 화병에 물을 떠오고, 며느리가 장미 송이를 꽂았다.
나는 머물기로 하고, 아들 부부는 언덕 너머에 있는 장인, 장모의 묘소에 참배하러 갔다.
장미 곁에 앉아서 나는 60 년 전 우리의 사랑을 회상한다.

2

대학 졸업반일 때, ‘대학 축제’에서 나는 남편을 만났다. 우리는 가장 무도회 ‘쌍쌍 파티’에서 짝이 되었다. 나는 ‘칼멘’으로 분장을 했고 그는 검은 색안경을 쓰고 내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무도회 내내 버걱대기만 했다. 내 친구 손 소야의 파트너 정수씨는 멋지게 여성을 리드하다가, 잠시 색안경을 벗고 우리에게 윙크를 날린다. 그 친구처럼 나를 즐겁게 해 줄 수가 없어서인지 그가 더듬거리며 양해를 구했다.
“난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서....., 미안합니더ㅡ”
“아니, 잘 하시네요. 처음보다 아주 잘 하세요!”
상냥한 목소리로 나는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잠시 스탠드에 앉아서 쉬는 동안에 그는 나에게 열심히 자기를 소개했다. 경상도 합천이 고향이며, 대농의 장남이었으나 중학교 시절부터 대구로 유학을 시키시느라고 지금은 소농이며, 군복부를 끝낸 복학생이라는 것을 알려서 그가 나보다 연상이라는 것을 은근히 암시하기도 했다.
“곧 대관식이 거행돼요. 어느 과 여왕이 가장 예쁜지 잘 보시고 말씀해 주세요.”
“잘 볼 필요 없읍니더ㅡ. 저는 ‘칼멘’씨가 제일 예쁩니더ㅡ”
그의 어색한 사교술에 나는 쌀쌀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 농담, 소용 없어요. 저는 장남하고는 사귀지 않기로 결심했으니까요.”
그렇게 내뱉고는, 나는 여왕과 시녀들의 행진에 열중했다.
축제에 참가한 전원이 이별가를 합창한 후 모든 프로그램이 끝나자, 나는 그에게 깎듯이 인사를 했다.
“즐거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러나 내가 교수실로 의상을 갈아 입으로 갈 때까지도 그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면을 벗고 있었다. 그도 색안경을 벗으면서 내게 묻는다,
“왜 가면을 벗지 않으십니까?”
“가장 무도회니까요.”

3

문장론 강의가 끝났을 때였다.
급우들이 우르르 몰려 와서
"얘, 영아야, 백마 탄 왕자들이 너를 찾는다!"
"복도에 나가 봐. 이 영아를 찾아."
이런 일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급우들이 더 흥분하며, 펼쳐져 있는 내 노트를 덮으면서 독촉을 했다.
강의실에서 나와 보니, 두 명의 청년이 인사를 한다. 며칠 전 쌍쌍 파티에서 만난 내 파트너와 정수씨였다.
"이 친구가 하도 같이 가자고 졸라서...."
정수씨가 내 파트너를 가리키며 머리를 극적인다.
"수업이 언제 끝나십니꺼? 학교 앞 '청송' 다방에서 기다리겠습니더. 안 나오시면 내일 또 찾아 오겠습니더ㅡ"
내 파트너의 반협박적인 요구에 나는 그만 웃음이 나왔다.
"한 시간 뒤에 끝납니다ㅡ"
뒤돌아 보니 급우들이 강의실 뒷문에 얼굴만 조로록 내밀고 대신 대답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데이트는 시작되었다.
마지막 강의가 끝나고 나는 소야를 불렀다.
"같이 나가자, 친구야"
"난 교수실에 가야 해. 내가 누구 눈총을 받으려고...?"
배실 배실 웃으며 교수실로 향하던 소야가 가던 걸음을 빙글 돌려서 내게로 뛰어오더니
"우리 정수씨가 그러는데, 창섭씨, 매우 건실한 사람이라 하더라. 잘 해 봐!"
귓속말로 전하고는 다시 몸을 돌려 뛰어간다.
이층 다방에는 손님이 별로 없어 한산했다. 조용한 음악이 감미롭게 흐르고 있었고, 다방 문 쪽을 향하여 그가 혼자 앉아 있었다. 친구들이 일부러 자리를 피해 준 모양이다. 내가 가까이 가니 그가 일어섰다. 내가 마주 앉으니 그가 내 옆으로 와서 앉는다.
“옆 자리에 앉는 것은 가까운 사이일 때나 그러는 건데요."
하니까
"앞으로 가까워지면 안 됩니꺼?"
하며 전혀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희한한 사람이로구나.'생각하며 찬찬히 그를 살펴 보았다. 이목구비가 뚜렸했다. 짙은 검은 눈썹은 강한 그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 같았고, 쌍꺼풀진 큰 눈은 그의 마음이 넓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옆 모습으로 보이는 코는 알맞은 높이로 귀티가 있었고, 적당한 크기의 선이 뚜렷한 입술은 대단히 육감적이었다. 내 파트너는 샌님 모습도 아니고, 점잔을 빼는 거만한 모습도 아니었다. 소탈하고 남성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어서인지 그의 외모에 거부 반응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환경이 내가 꿈꾸던 이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누님 한 분은 출가를 하셨고, 밑으로 남동생이 셋이 있다고 했다.
우리 대 가족과 함께 살고 계신 올캐 언니가 겪는 고충을 직접 보고 느끼고 있는 나는 장남과는 결혼을 하지 않기로 작정을 하고 있었다. 더우기 6.25 사변으로 인해 우리 집은 가세가 갑자기 기울어서 내 학창 시절에는 물질적인 어려움을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부자 집으로 시집을 가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장남하고는 결혼을 안 할 겁니다. 그리고 결혼할 때에 나의 가정에는 피아노가 있어야 해요."
나는 음대생도 아니고 피아노는 '바이엘'도 칠 줄 모르면서도 부유한 가정으로 시집을 가고 싶다는 소망을 이렇게 칼로 베 듯,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상대에게 내뱉았다.
그러나 우리들의 교제는 3년이나 지속되었다. 이성적으로는 그를 만나면 안 되었지만, 감성적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단단히 마음을 다잡고 그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일 주일을 지내는 동안에, 나는 우연히 <하숙생> 이라는 한국 영화를 보게 되었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가난하다는 이유로 첫 애인을 버리고 부자 남자를 택하여 결혼한 여인의 슬픈 사랑 이야기였다. 나는 그날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영화 속에서 보여준 가난한 애인의 슬픔과 고통과 분노가 바로 그의 울부짖음 같이 느껴졌고, 그 여인의 슬픈 운명이 바로 내 운명이 될 수도 있다고 나의 양심이 나를 채근해 왔다.
나는 그를 찾아 나섰다. 기원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 그의 얼굴은 슬픔이 가득해 보였고 왼쪽 팔은 축 늘어져 있었다. 나를 보더니, 바둑 친구에게 인사도 없이 뛰어 나왔다. 그 날 우리는 첫키스를 하였다. 나는 그가 좋아지면서 그에게 입술을 허락할 때에는 멋진 분위기 속에서 허락을 해야지...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날 그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나를 어두운 벽으로 밀어부치더니
"미스 리,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면서 내 두 손을 꼼짝 못하게 고정시키고는 일방적으로 내 입술을 마구 빨기 시작했다. 나는 싫은 척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피해 보았지만, 사실은 나는 그의 그런 야성미가 좋았다. 비록 내 입술은 도둑 맞았지만, 아주 매력을 느꼈다. 화난 척 뿌리치며 그를 뒤에 두고 뛰면서 나는 웃고 있었다.
나는 가난하게 살기로 작정하였다. 부요함과 사랑 중에서 사랑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그 이후로 우리는 진정한 연인이 되었다. 우리는 만나면 대화가 끝없이 계속된다. 우리가 들어가는 다방은 종업원들이 늦게 퇴근을 해야만 했다. 우리가 문 닫는 시간에도 나중까지 안 가고 소곤대니까, 나가라는 뜻으로 주위의 의자를 모두 탁자 위에 올려 놓고 심하게 먼지를 내며 비질을 하는 곳도 있었다.
그는 소유욕도 강할 뿐 아니라 개척 정신도 강해서, 등산을 할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등신길을 따라가지 않고, 언제나 전혀 사람들이 다닌 일이 없는 곳으로 나를 끌고 다녔다.
대학 졸업 후에 우리는 직장을 얻었다. 그가 정식 기자로 활동하게 되고, 나도 정식 교사로 근무하게 되자, 그는 결혼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의 끈질긴 회유로 가족 회의가 열렸고, 드디어 우리는 1967년 11월 11일 오전 11시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사랑의 역사를 엮어가게 되었다.

4

시내 이문동에 새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외관상으로는 꽤 보기 좋은 집이었지만, 우리는 그 집 중에서 방 한 칸만 빌렸을 뿐이다. 부엌도 없어서 지하실 연탄불에서 밥을 지었다. 남편이 매일 아침마다 잠자리를 개고 방을 치우는 동안에 나는 콩나물 국을 끓이고 시금치를 데쳐 나물로 무쳤다.
"내가 이불 개 주었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래이ㅡ "
남편이 제법 엄숙하게 말한다.
"경상도 문둥이ㅡ"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웃었다. 하숙집 음식으로 길들여진 남편의 입에는 나의 음식 솜씨가 최고였다. 음식을 만들어 본 일이 없는 나는 그 비싼 참기름을 듬뿍 듬뿍 넣었던 것이다.
셋방 살이 8개월 만에 우리는 집을 살 궁리를 하였다. 내가 임신을 했는데, 우리의 첫아기를 셋방에서 키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렵게 빌린 돈으로 우이동 신흥 주택으로 입주하자마자 남편은 텃밭을 만들었다. 집을 빙ㅡ 둘러서 제법 마당이 여유가 있어서 뒷마당에는 식생활에 필요한 채소를 심기로 하고, 앞 뜰에는 화단을 만들었다. 줄장미 묘목도 사서 담장 밑으로 심었다. 텃밭부터 만들다보니, 앞마당에서 내가 펌푸질을 하여 부엌까지 물을 길어 나르는 것이 안스러웠던지 남편은 먼저 자가 수도를 놓기로 순서를 바꾸었다. 책을 보면서 자료를 사 모으고 손수 공사를 시작했다. 내가 인부를 부르자고 했지만, 인건비를 우리의 가계부 예산에 넣을 수 없단다. 다달이 집 부금에다 계돈도 부어야 하고, 더우기 고향 집으로 양계를 위한 송금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양계는 가계를 부흥시켜 보자는 남편의 첫 사업 계획이었다.
양계가 실패하였다. 원인 모를 병으로 다 죽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소를 키워보기로 했다. 소 20 마리를 농협 빚을 내어 사기로 하고, 우리가 갚아 나갔다. 그러나 그 일도 실패하였다.
그 동안 줄장미는 자라서 온 담을 소담스럽게 뒤덮었고, 꽃밭에는 각 종 꽃이 어울어졌다. 뒷터밭에는 오이, 풋고추, 깻잎 등이 무성하여 무공해 야채로 따먹게 되었다. 나는 시댁을 일으키려고 밑빠진 독에 물붓고 있는 일에는 불평을 하지 않고, 아침마다 화단에 물을 줄 때에 화단 밑 바닥에 납짝하게 피어서 남편의 눈길을 끌고 있는 석죽화를 보고 앉아 있는 남편을 질투했다.
"내가 거기 들어 앉아 있을까?"
쌜쭉하여 튕긴다.
"나는 당신의 내게 대한 정열 하나만 보고 결혼했어요,"
내가 그에게 불만이 있을 때에 던지는 엄포이다.
어느 날, 장미가 아름답게 자라고 있다고 동네 아줌마들이 떼를 지어 몰려 와서
"이 댁을 '장미 집'이라고 불러요."
"어찌 그리 부지런하세요?"
"건실하셔서 이 댁 부인은 좋으시겠다."
사탕발림이겠지만 이렇게 남편에게 칭찬을 하면 남편은 답례로 장미 한 송이씩을 끊어 선물하기도 했다. 앞 집 젊은 부인에게는 남편이 두 송이를 끊어 주었다가 나에게 밤새도록 볶였다. 왜 그녀에게만 두 송이냐고 따졌다. 그 날 내가 또 엄포를 날린 것은 물론이다.

5

사실 내 남편은 체질적으로 맥주 두 잔이면 벌써 취기가 올라서 얼굴이 달아오르며 무엇보다도 졸음이 쏟아져서 견딜 수가 없어 한다. 기자들의 생활이란 거의 매일 술 좌석이 벌어지게 마련인데, 남편은 옆 자리의 아가씨에게 미리 팁을 주고 자기의 술잔을 대신 마시게 해 왔다. 이를 눈치챈 상사가
"어이ㅡ 현 기자, 특종 상이 이번이 몇 번째야? 너무 혼자서 튀면 안 돼지? 자! 내 축하주 한 잔, 내 앞에서 쭈욱 ㅡ"
여기 저기서 쏟아지는 축하주를 남편은 꼼짝 없이 받아 마실 수 밖에 없었다. 그 날 술 좌석에서 쓸어진 후, 남편은 필림이 끊겼다고 한다. 그 후로 나는 저녁 상을 같이 할 때마다 남편의 주량을 늘리기 위하여 소주 한 잔씩을 권했다. 남성 사회, 특히 언론계에서는 술 좌석에서 밀리면 조직 사회에서 도태되기 쉽다는 것을 나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의 체질은 변하지 않았고, 남편은 한국의 술 문화를 힘들어 했다.
그래도 남편이 국방부와 사회부 일선 기자로 뛰면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입사 일년도 안 되어 특종상(가장 먼저 기사 거리를 찾아낸 기자에게 주는 상)을 일곱 번이나 받았기 때문이리라. 기자 생활 20 년 된 상사 중에도 특종상을 한 번도 받지 못한 분들도 많았다.
큰 아들이 국민(초등) 학교에 입학하고 작은 아들이 유치원에 들어갈 무렵, 박 정희 대통령은 '유신 체제'를 공포했다. 은근히 언론이 통제되고, 기자가 소신대로 펜을 놀릴 수가 없었다. 열심히 기사 거리를 마련해 가도
"요새는 몸을 사려야지, 잘못하면 곤경에 빠지게 돼!"
하며 상사가 찢어버리는 경우가 잦아졌다. 사회의 부정을 고발하지 못하도록 기자들의 입을 막기 위해 기자실로 촌지가 배포되기도 했다.
남편은 회의에 빠지기 시작했다.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서 언제까지 이 부끄러운 촌지를 받으며 생활을 이어가야만 하는 것일까? 기자가 사회의 목탁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기자 생명은 끝난 것이나 다름 없다고 판단되었다. 남편은 다시 생의 전환점을 찾아야만 했다.
대한 민국의 국력의 상징인 '점보 비행기'가 첫 운행을 할 때 각 계의 언론계 대표들이 동승하여 미국 대륙을 횡단한 일이 있었다. 그 때 함께한 남편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대지였다. 눈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넓은 평원은 정교한 바둑판처럼 정지되어 있었고, 모두 기계의 힘으로 농사를 짓고 있었다. 남편은 동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고 한다. 경상도 합천 구석 ㅡ 여름이면 매년 낙동강 물이 범람하여 일년 내내 피땀흘려 지어 놓은 농사가 물에 씻겨 내려가고, 양계도, 양우 사육도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곳 ㅡ 강산이 아름답고 인심이 후덕한 고향 마을이기는 하나, 한 고을을 이루고 살고 있던 현씨 문중에서도 벌써 여러 세대가 도시로 떠났다.
시동생들은 남편의 힘이 필요했고, 남편 또한 동생들과 힘을 합쳐서 현씨 문중을 일으키고 싶어졌다. 남편은 서서히 이민을 꿈꾸기 시작했다. 미국의 그 넓은 대지에서 동생들과 함께 마음껏 <대농의 꿈> 을 이루어 보고 싶은 욕망이 날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때 당시 기자 직업은 미국 이민 순위가 삼 순위에 해당했으므로 보다 빨리 이민 허가가 나올 수도 있었다.
남편은 퇴근 후 시간만 있으면 영어 회화 공부에 열중했다. 내가 남편의 생활 변화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둘러 말하지 않았다. 남편의 심경의 변화를 다 듣고 난 후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의 <대농의 꿈> 은 <국토 확장> 이라고 생각해요. 이 비좁은 나라에서 아웅다웅 하지 말고, 능력이 있으면 넓은 곳으로 가서 꿈을 펼쳐 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지요. 하지만, 나는 시골 생활은 힘드는데..."
“농장은 동생들이 운영할 것이고, 우리 식구들은 도시 생활을 하게 될 거야. 우리 두 아들은 미국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도록 할 거야.”
남편이 이민 설계도를 펼쳐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장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기로 합의했다.
이튿 날 남편은 우리 가족의 미국행 이민을 신청했다.

6

우리 부부는 미국행 이민을 계획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발길을 다른 길로 인도하셨다. 우리가 미국 이민을 신청하자마자 쿼터제여서 동양계 미국 이민길이 막혀버렸다. 열려 있는 곳은 파라과이 농업 이민길 뿐이었다. 우리는 어차피 농업 이민을 꿈꾸고 있었으니까, 남미를 거쳐서 미국으로 들어가기로 하고, <대농의 꿈> 을 계속 키워갔다.
드디어 1977년 3월 7일, 우리 부부는 펜을 던지고 황무지로 떠났다. 일행은 모두 5 명이었다. 우리 부부와 다섯 살, 여덟 살의 두 아들, 그리고 스무 살 된 막내 시동생이었다. 우리 다섯 식구는 파라과이에서는 날씨가 너무 더워서 정착하지 못하고, 남편이 사전 답사를 하고난 후, 칠레에 정착하기로 했다.
수도 싼티아고(Santiago)에서 3 시간 거리인 로 깜뽀(Lo campo) 우리 땅은 황무지였으나, 주위에는 포도 밭과 복숭아 밭으로 둘러 싸인 농장 지대였다. 남편은 연애 시절에도 등산을 할 때에는 남이 다니지 않는 길로만 나를 이끌고 다니더니, 이억만리 지구의 반대 편에 와서도 칠레인들도 하기 싫어하는 양돈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방목을 하는 소고기보다 사람의 손이 많이 가는 돼지고기 값이 훨씬 비싸기 때문에 쉽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민을 떠날 때 김포 공항에서 언니들이 신신 당부한 말씀이 있다.
“이민 생활에서 꼭 성공하려면 특히 부부가 ‘일심동체’이어야 한다더라. 네 남편은 현명한 사람이니, 너는 남편 말에 ‘절대 복종’해라.”
그래서 나는 남편 말에 절대 복종했다. 우리의 통나무 집을 짓기 전 텐트 생활을 할 때에는 새벽밥을 지으라고 하면 등잔불을 들고 돌화덕 앞에 엎드려서 마른 나무 가지를 꺾어 불을 붙이고 연기에 눈물을 흘리며 밥을 지었고, 전기가 없는 곳이어서 냉장고를 옷장으로 쓰면서 육식을 보충하려고 토끼를 기를 때에도 땡볕에 땀을 흘리며 구루마로 토끼풀을 실어 날랐다. 남편과 시동생은 황무지를 개척하느라고 수염이 자라도 깎지를 못했다. 시동생은 고향에서 농사를 지어 보았지만, 남편은 펜만 잡던 손으로 ‘나손’이라는 사람 크기만한 낫으로 잡풀을 베어내야 하니, 저녁이면 벗겨진 남편의 손바닥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러나 형제는 결사적이었다. 그 땅에서 우리는 살아남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개간한 땅에 돼지 먹이로 고구마부터 심었다. 남편은 동네의 이장인 빼드로(Pedro) 아버지의 도움으로 트랙터도 빌리고 고구마씨 심는 것도 배웠다. 일 주일만에 정말 파릇파릇하게 고구마 순이 올라왔다. 제법 잘 자라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에 보니까 그 넓은 밭의 고구마 잎이 모두 죽어 있었다. 날씨 변화를 잘 몰라서 좀 늦게 심은 고구마 잎이 서리를 맞은 것이다. 그러나 두 남자는 실망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사전에 ‘불가능’이 없었듯이, 남편은 이렇게 외쳤다.
“내 사전에는 ‘포기’란 없어!”
그래서 또 다른 돼지 먹이로 옥수수를 계속 심었다.

7

농토를 구입했으니 개간을 서둘러야 한다고 텐트(tent)를 챙겨 가지고 떠난 지 두 주일만에 남편과 시동생이 돌아왔다. 얼굴은 몰라보게 햇빛에 검게 그슬려 있었고, 그 동안 목욕을 못하여 두 사람의 머리는 새둥지처럼 엉켜 있었다. 나는 왈칵 울음이 솟구쳤다. 옷을 입어도 항상 깃을 반듯하게 세우는 깔끔했던 남편이었는데, 펜을 던지고 농기구로 바꿔들고 나선 지 며칠만에 완전히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농토로 따라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로 깜뽀(Lo Campo) 우리 농토 옆으로 수로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안데스의 만년설이 녹아내린 맑은 물이 풍성히 흐르고 있었다. 텐트 옆 수로 곁에 한국과 똑같은 버드 나무 한 그루가 치렁치렁 나뭇가지를 늘어뜨린 채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 나무 밑에 부엌을 차렸다. 그늘 밑으로 식탁을 옮기고 그 위에 소꿉장난 하듯이 살림 도구를 차렸다. 남자들이 프로판 가스를 구하지 못하여 돌로 야외 화덕을 만들어 밥을 지어 먹었는가 보다. 나는 개울물로 쌀을 씻어 냄비에 앉히고 돌화덕에 걸어서 점심 준비를 하였다. 마른 나무를 주워와서 큰 가지는 꺾어가며 불을 지펴야 하는데, 힘이 모자라서 꺾이지를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남자들은 식구가 늘었으니 새로운 움막을 마련하기에 바빴다. 나는 이제부터는 모든 일을 혼자서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뭇가지를 발로 밟으며 힘주어 꺾다보니 손바닥이 벗겨지고 손등에서 피가 난다. 모닥불을 피워 본 일이 없으니 아궁이에 불을 집히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화덕이 땡볕 속에 있었기에 어느 새 이마에서는 비오듯 땀이 흘러서 눈썹을 넘어 눈 속으로 들어와 따갑다. 서러움이 섞인 눈물이 마구 흘렀다. 옆에서 철없이 뛰노는 아이들에게 들킬까 봐 얼른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허리를 펴고 얼굴을 드니 아이들이 묻는다. "엄마 얼굴이 왜 그래? 인디안 같아. 여기..., 저기도 검은 줄이 있어요!" 손등으로 땀을 닦을 때 끄으름이 묻은 모양이다. "우리, 세수하자!" 나는 수로로 내려가 개울물에 시원스럽게 세수를 하였다. 두 아들이 타잔 놀이를 하느라고 머리에 버들가지를 두르고 팬티만 입고 있기에 아이들에게 물을 튕겼다. 아이들도 지지 않고 나에게 물을 튕긴다. "아이구, 밥 타겠다!" 나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를 뒤로 하고는 야외 부엌으로 뛰어왔다. 이 나라 사람들은 점심 식사 후에는 3 시간 정도 낮잠을 잔다. 낮 기온이 최고로 오를 때에는 가게 문도 닫고 휴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시간이라고 해서 쉴 수는 없었다. 인부를 구하는 일은 그들의 낮잠 시간(siesta-씨에스따)을 피하여 오후 4 시 이후로 하기로 하고, 남편과 시동생은 짓던 움막을 계속 짓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서반어 공부를 시켜 놓고 나는 수로로 내려가서 설거지를 하였다. 시동생과 아이들이 텐트에서 자기로 하고, 나와 남편은 반 트럭 위에 신방을 꾸몄다. 내일이면 움막이 완성되니까 오늘 하루 밤만 자면 된단다. 농사를 지으려고 준비한 비닐을 바닥에 깔고 두꺼운 이불을 폈다. 이곳 날씨는 한 여름인데도 새벽에 서리가 내리고, 낮에는 햇빛이 비추는 곳은 뜨거워도 그늘에만 들어서면 곧 시원해진다. 습도가 낮은 것이다. 한국처럼 진땀이 나거나 장마철이 없다. 시동생이 이불 위에도 비닐을 덮어야 아침 이슬에 이불이 젖지 않는다고 하여, 우리 부부는 비닐 덮개를 하고 이불 속으로 자러 들어 가면서 킥킥 거리다가 곧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과연 비닐 덮개가 이슬에 흠뻑 젖어 있었다. 우리들의 몸은 지지개를 힘껏 폈는데도 개운치가 않았다. 남자들이 새로운 집을 다 만들어 놓았단다. 버드 나무의 굵은 가지를 꺾어 둥글게 휘어서 지붕을 만들고 그 위로 농사짓기 위해 사온 비닐이 덮여져 있었다. 새장을 좀 크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햇빛을 막을 수는 없지만 비는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들이 그 안으로 부부 침대를 들여 놓았다. 텐트보다 면적이 넓어서 옷 보따리를 비닐 집으로 옮겼다. 남편은 군대를 다녀 온 사람이라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법을 알았다. 나무 가지로 멋지게 옷걸이를 만들어 주어서 옷을 정리할 수 있었다. 저녁이 되니 바람이 몹시 불었다. 윙 ㅡ 윙 ㅡ 바람 소리가 다 들리고, 버드 나무 가지가 미친 여자가 머리를 풀어 놓은 듯이 바람결에 마구 흔들리는 모습도 다 보였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떠 있고........ 마치 광야에 누워 있는 기분이다. 말이 없어진 나를 보며 남편이 반어법으로 말한다. "어때? 헬리콥터 탄 기분이지? 남편 잘 만난 덕에 지상 헬리콥터도 다 타보고..." 나는 픽 ㅡ 웃고 말았다. 어설픈 초원의 집에서 우리의 역사는 시작되고 있었다.

8

아침 식사가 끝날 무렵, 처음으로 칠레인 한 가족이 우리 농장을 방문했다. 30 분 거리에서 식료품점(almacen)을 하고 있는 가족이었다. 나도 그 가게에 가서 설탕을 사온 일이 있었는데, 온 가족을 함께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남편 안드레(Andre)는 한국 사람이나 다름 없는 외양이었고 부인은 인디오 쪽에 가까웠다. 아이들이 넷이나 되었다. 모두 우리 아이들 또래였다. 어제 밤에 심하게 바람이 불어서 우리의 탠트가 날아간 것 같아서 밤새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우리가 무사하니 고맙다고 하늘을 향해 합장을 하며 기뻐했다. 오는 일요일 저녁을 자기 집에서 같이 먹자고 우리 식구를 초대했다. 나는 그날을 어린 아이처럼 기다렸다.
이틀 후 저녁, 시동생이 집을 보기로 하고 우리 네 식구는 인삼차를 선물로 들고 안드레 집을 찾았다. 그의 집은 로 깜뽀 지역의 중심지에 있었다. 학교도 그 동네에 있다고 해서 우리 아이들도 그의 딸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안드레 부인의 음식 솜씨는 뛰어났다. 나에게도 칠레 음식 요리법을 알려 주겠다고 했다. 그보다도 더 좋은 소식은 자기 집의 세탁기로 빨래를 하라는 것이다. 사실 나는 흙뭍은 두 남자의 청바지를 시냇가에서 빠는 일이 고역이었다. 듣던 중 반가운 친절이었다. 안드레가 우리을 위해 걱정을 했다.
“한 달만 지나면 비가 올 터인데, 계속 텐트 생활은 힘들 것인데요....”
“시간이 없어서 집을 못 짓고 있습니다.”
안드레 부인이 거침없이 말한다.
“안드레가 도와줄 수 있을 거에요. 운전을 할 수 있답니다. 가게는 나와 애들이 보면 되고요.”
안드레가 덧붙인다.
“조립식 통나무집을 파는 곳을 알아요. 같이 가서 계약만 해 주면, 실어 나르는 것은 내가 하지요.”
우리가 떠날 때에 안드레 부인은 같이 못 온 영섭 도련님 앞으로 음식을 풍족히 싸서 보냈다. 안드레는 집을 짓는 일뿐 아니라 돈사(돼지집)를 지을 목재와 시멘트까지 날라 주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사들을 붙여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 나는 우리 두 집의 만남이 하나님의 큰 은혜였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고구마 농사에 실패하고 내가 실의에 빠져 있을때, 대학 동창 손 소야의 편지를 받았다. 정수씨와 결혼하여 나의 아들과 비슷한 나이의 두 아들을 잘 키우고 있는데, 지금은 YMCA에서 기독 청년들을 지도하고 있다고 했다. 외국이고 더우기 시골이라서 한국 교회가 없으면 ‘가정 제단’을 쌓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권면하고 있었다. 이 편지가 천사의 편지가 되어 우리는 ‘가정 제단’을 쌓기 시작했다. 남편이 설교를 맡았고 우리는 등잔불 밑에서 목청껏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올려 드렸다. 날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곳으로 인도하시기를 간구했다.

9

남자분들의 일이 늦게 끝는다고 해서 내가 저녁을 몹시 늦게 시작하였다. 뜨거운 국을 한 솥 끓여서 식탁 밑에 놓아두고, 잠시 등잔불을 들고 부엌으로 밥솥을 가지러 간 사이에
“으악ㅡ!”
비명 소리와 함께 둘째 아들이 한 쪽 발을 치켜들고 팔팔 뛴다. 식탁 밑이 어두워서 국솥을 보지 못하고 밟았던 것이다. 기겁을 한 큰 아들이 일터에 있는 아빠를 부르고, 나는 정신 없이 아이의 양말을 벗기는데 살가죽이 같이 묻어 나온다. 손발이 떨려서 자동차 안에 있는 구급 약통을 가지러 갈 생각도 못하고 급한 대로 된장을 바르면서 나는 자책하며 아이와 함께 울었다. 시동생이 집을 보고 남편이 운전을 하여 쟈이쟈이(Llay Llay) 도시에 있는 작은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권아, 괜찮아? 괜찮아?”
자지러지게 울부짖는 동생 옆에서 애태우며 울먹이는 장남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과묵한 남편은 앞만 보고 달렸지만, 우는 아들보다 더 아픈 표정이다.
“병권아, 조금만 참아. 곧 병원에 도착할 거야.”
나는 삐져나오는 울음을 꾹꾹 눌러 삼키며 목까지 움추린 채 아들을 끌어안고 있었다.
인부들이 쉬는 일요일이면 시동생이 집에서 쉬는 동안에 우리 네 식구는 이 쟈이쟈이 언덕을 넘어서 작은 도시로 생활 필수품을 사러 가곤 했다. 그 시간이 가족 모임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재롱을 부리면 길가 양편으로 열병하듯 늘어서 있는 높은 미루 나무는 더 멋져 보였고, 언덕 아레로 펼쳐지는 파란 포도밭과 멀리 보이는 산 밑의 복숭아밭은 분홍색으로 아름답게 아롱지곤 했었는데.... 그날 밤은 울며 쟈이쟈이 고개를 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안드레씨는 우리 집을 위하여 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둘째 아들이 아직 발등에 붕대를 감고 있던 날, 안드레씨 온 가족이 농장으로 들어 섰다.
“로베르또(Roberto)! 레갈로(선물)! 레갈로(선물)!”
안드레씨의 아이들이 병권이의 이름을 부르며 선물을 가지고 왔다고 활짝 웃으며 제각기 떠든다. 안드레 부부가 펴 보인 선물 보따리에는 전기줄과 전구, 그리고 큰 기계가 보였다. 자가 발전기를 이용하여 우리 집에 전기불을 달아주려고 준비해 온 것이다.
내가 부추 빈대떡을 부치는 동안에, 안드레와 남편이 방마다 전등을 설치하였다. 설치가 다 끝난 후, 과연 저기불이 들어 올까? 다 같이 전등을 올려다 보며 가슴을 조리는데
“우도(하나), 도스(둘), 뜨레스(셋)!”
온 식구가 외칠 때 안드레씨가 스위치를 올리자, 아! 빤짝 빤짝 전등알이 빛났다!
“쏘프레사(Soprresaㅡ놀라워)! 쏘프레사(놀라워)!”
온 식구가 함께 얼싸안고 껑충! 껑충! 뛰었다.
정말 행복한 순간, 영원히 기억해야 할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전등불 밑에서 온 식구가 부추전을 먹었다. 안드레 식구들은 부추전을 제일 잘 먹는다. 시동생이 잠자던 T.V.와 냉장고에도 전선을 연결해 주었다. 두 아들은 이제부터 텔레비전을 볼 수 있다고 펄쩍 펄쩍 좋아한다. 나는 이제부터는 소고기를 사와서 냉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니 실실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냉장고 안에 있던 옷을 전부 꺼내 옮겼다.

10

아이들은 학교에 갔고 시동생과 남편은 교포들에게 배추를 팔려고 수도 싼티아고에 올라갔다. 내가 집을 보다가 돈사에 들렸다. 암퇘지가 수상했다. 한 곳에 있지 못하고 이리 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새끼를 낳으려나 보다. 나는 겁이 덜컥 났다. 내가 혼자서 어찌 해산관을 할 수 있겠는가? 그때 나는 긴 홈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두 손으로 드레스 앞 단을 들어 올리고 15 분 거리의 마을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을 만나면서 서툰 서반어로 소리쳤다.
“아쥬다 메(나 좀 도와줘요)ㅡ”
“미 찬초(우리 돼지).... 와구아(애기)! 와구아(애기)!”
급하면 통하는 모양이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져서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 왔다. 어떤 남자들은 나보다도 먼저 돈사에 가 있었다. 과연 암퇘지가 세 번째 새끼를 낳고 있었다. 어느 분이 돼지는 새끼를 낳으면 발톱을 잘라주어야 한다는 상식이 있었던지 먼저 나온 새끼를 들어 올려 발톱을 깎으니, 어린 돼지 새끼가 꽥! 꽥! 소리를 지르며 법석을 떤다. 내가 그때 어미 돼지의 눈을 보았는데,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아마도 자기 새끼를 죽이려는 줄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문제가 생겼다. 어미 돼지의 출산이 중단된 것이다. 뒤늦게 빼드로 아버지가 나타나서 동네 사람들을 질책했다. 어미 돼지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며 새끼 발톱은 나중에 깎아도 된다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을 다 돌려 보낸 후에, 그는 어미 돼지의 배를 쓸어주며 안심을 시켰다. 이렇게 놀라서 어미 돼지가 출산을 중단하면 어미 돼지까지 죽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하나님을 찾았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어미 돼지만이라도 살려 주세요!”
간절히 기도했다. 남편과 시동생이 얼마나 이 돈사에 심혈을 기울였던가! 돈사 안으로 들어가서 돼지와 함께 살면서 물꼭지에 돼지 입을 대주며 물 먹는 법을 가르쳤고, 침실에서 변을 보면 꾸짖으면서 변을 치우고 일부러 변을 밖의 배설실에 모아 두어서 시청각 교육을 시켰으며, 배설실에서 변을 볼 때는 칭찬하며 등을 두드려 주고 좋은 먹이로 상을 주면서 훈련을 시키지 않았던가!
저녁 늦게 남편이 돌아 왔을 때 나는 긴장이 풀려서 울고 말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보셨는가 보다.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남편과 시동생이 극진히 간호한 끝에 암퇘지는 출산을 계속했고, 그것도 어미 돼지의 젖꼭지 수에 꼭 맞게 12 마리나 출산했다. 할렐루야!
나는 시골 생활이 처음인데다가 더우기 돼지 키우는 일은 전혀 경험이 없기 때문에 돼지 새끼들이 자라는 것이 신기하였다. 두 아들도 신기한지 돈사 안으로 들어가서 젖먹는 돼지 새끼를 안아 올렸다. 돈사를 지나던 남편이 우리 곁으로 오더니
“돼지 새끼가 14 마리네ㅡ!”
한다.
“12 마리지요ㅡ.”
남편이 착각을 하는가 하여 내가 일러 주었더니
“저기 두 마리가 더 있지 않어?”
하면서 자신의 두 아들을 가리킨다. 정말 우리 두 아들은 흙바람 속에서 돼지처럼 뒹구면서도 잘 자라 주었다.
내 아들들처럼 돼지 새끼들도 잘 자라주나보다 했는데, 삼 주가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새끼 돼지들이 비틀대며 걷지를 못하고 쓰러졌다. 또 무슨 변고가 생기려나? 놀란 남편이 안드레 집까지 뛰어가서 마을 전화로 검역관 안토니오에게 문의하였다.
“철분 주사를 맞히었소?”
“아무 주사도 주지 않았소.”
“철분 부족이니 염려 말고, 오늘 오후에 들려서 해결해 주겠소.”
돼지 새끼들은 오후에 검역관 안토니오의 주사 한 대씩을 맞고나서는 거짓말처럼 나아서 씩씩하게 뛰어 다녔다. 남편이 돼지먹이 사료상에서 안토니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찌할 번했을까? 하나님은 또 다른 천사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던 것이다.

11

등잔불 밑에서 정성껏 올린 예배를 받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양돈 사업을 축복해 주셨고, 두 번째 천사 안토니오를 사용하셔서 3 년만에 우리 식구를 황무지에서 항구 도시로 옮겨 주시면서 선식업(선박에 납품하는 사업)으로 우리를 크게 부흥시키셨다.
남편은 드디어 꿈꾸던 <대농> 을 이루기 위해 동생 가족들을 초청했다. 대가족 현씨 문중이 모여서 400 명 종업원을 거느리며 농장으로, 태평양 연안으로 바삐 뛰면서 우리는 하나님 없이 우리끼리 ‘바벨탑’을 쌓아 올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에서처럼 우리의 ‘바벨탑’을 흩으셨다.
그렇지만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사랑의 붕대로 감싸주사, 13 년만에 우리도 잊고 있었던 미국 영주권을 우리 가족에게 기적적으로 허락하셨다. 칠레에서 얻은 외동딸 하나와 함께 우리 부부가 미국에서 유학 중인 두 아들을 만났을 때는, 우리 부부는 어느 덧 중년을 넘기고 있었다.
미국에 온 지 15 년이 넘었다는 남편의 친구 송 선생님 내외 분은 세탁소 두 곳을 운영하고 계셨다. 수영장이 있는 저택에서 두 딸을 동부로 유학을 보내고 두 분이 오붓이 안정된 삶을 누리고 계시지만, 이민 초기에는 무척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부인은 식당에서 부엌 설거지를 했고, 남편을 수영장 청소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초기에는 자존심을 다 버리고 오직 사업 자본금을 모으는 데에 물불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고, 우리의 정신력부터 무장시켜 주셨다. 우리의 각오가 선다면 당장이라도 수영장 청소와 식당일을 알아봐 줄 수 있다고 했다. 이 제안을 듣고 두 아들은 고개를 떨구었고, 남편은 아주 슬픈 얼굴을 하였다.
차남 병권이가 자기의 생각을 말한다. '형은 의대에 입학했으니 입학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고, 아버지는 건강 상 노동을 감당하지 못하실 것이므로, 자기가 일 년 휴학을 하면서 가족을 돌보겠다'고 나선다. 언제나 병권이는 희생 정신이 깊었다. 우리는 눈물을 글썽이며 신문의 구직란을 살피기 시작했다. L.A에서 두 시간 거리인 어바인(Irvine) 도시에 있는 어느 회사에서 서반어에 능통한 직원을 찾는 곳이 있었다. 병권이와 남편이 찾아가 보았다. 운동 모자를 만들어 수출하는 회사인데, 병권이는 본사에서 근무하도록 하였고, 남편은 멕시코에 모자 제조 공장을 새로 설립하는 일을 맡겨 주었다. 남편은 주말에만 귀가할 수 있는 처지가 되고 말았지만, 노동으로 시작한 교포도 있는데, 임시직이기는 하지만 현지 사장 역할을 하는 자리이니, 무조건 감사할 일이었다.
생활 방향이 정해지자, 우리는 어바인 도시에 아파트를 얻었다. 나도 직장을 찾아 나섰다. 걸어 다닐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의 빵집에서 보조 주방장을 찾고 있었다. 주방장이 서반어를 하니까 내가 뽑혔다. 나는 빵 종류가 그렇게 많은 줄은 처음 알았다. 소세지 종류도 많아서, 주문하는 빵의 종류에 따라 알맞는 소세지를 넣어야 했다. 나는 주방장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배웠다. 그 곳에서의 경험이 훗날 내가 어린이 학교를 운영할 때에 잘 쓰이게 될 줄은 그 때에는 전혀 몰랐었다.
의과 대학에 입학한 장남은 교민 회장 댁에 하숙을 하기로 했다. 공부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병철이는 일요일이면 교민 회장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중.고등부 학생들을 맡아서 성실히 가르쳤다. 밥만 먹으면 책과 씨름해야하는 이 인생이 짐승이지, 사람이냐고 고민하는 편지도 왔지만,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동생을 보아서라도 이겨내야 한다고 엄격한 답장을 보냈다.
차남은 사장이 말단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해서, 하루 종일 창고에서 짐짝만 날랐다고, 몸과 마음이 아파서 몸부림쳤다. 두 달을 묵묵히 참고 견디니까 사무직으로 승진시켜 주었다. 멕시코 공장이 설립되고 자리가 잡히자 남편이 할 일이 없어졌다. 실직이 되려는 그 때, L.A에 있는 F.M 서울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을 보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어바인으로 떠나기 전에 제출했던 남편의 이력서를 보고 부른 것이었다. 방송국을 다녀온 남편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F.M 서울 방송국 앵커로 일하고 계신 김 의원님이 언론계 출신인 친정 오라버님의 절친한 친구분이셨던 것이다. 남편은 김 의원님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가면서 새로운 직장 생활을 하게 되었고, 따라서 병권이도 L.A에 직장을 알아보기로 했다. L.A는 갱(gang)들이 판을 치는 무서운 곳이라고들 해서, 구직 광고를 보고 나도 병권이와 함께 그 회사를 찾아갔다. 그 때 만난 진 사장님은 착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병권이를 높혀주고 인정해 주어서, 지금까지도 교분이 좋다. 그분이 나가시는 등대 교회에 온 식구가 등록을 하면서 신앙 생활도 지속되었다.

12

그 때 우리는 F.M 서울 방송국에서 걸어서 10 분 거리인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남편이 걸어서 출근하고, 내가 어바인에서 받은 운전 면허증을 가지고 차를 몰고 20 분 거리에 있는 햄버거 가게에 출근했다. 한국인이 주인이었는데, 가게 규칙대로 일꾼 제복을 입고 주문하는 빵을 열심히 만들어 대령했다. 낮에는 바삐 일하느라고 잘 모르겠는데, 저녁 8 시부터 퇴근 시간 9 시까지 한가한 때에 어둠을 뚫고 창구로 얼굴을 들이밀며 빵을 주문하거나 구걸을 하는 흑인들이 몰려 올 때는 등골이 오싹해지기도 했다. 어떤 흑인 남자는 아주 노골적으로 끈끈한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무서워서 일을 그만두고 싶어했는데, 그 때에 4.29 폭동이 일어났다.
4.29 폭동의 피해는 한인업주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가정에도 엄청난 피해를 불러 왔다. 폭동 이후, 광고주들의 광고 신청이 줄어서 재정상의 문제가 발생했다고 하면서, 남편을 스카웃(scout)하려던 KBS T.V 에서는 남편의 초빙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말았다. 남편이 그들과의 구두 약속을 믿고 이미 재직 방송국의 후임 선발을 위하여 사표를 제출한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당시의 KBS T.V의 지국장은 인간대 인간의 신의를 지키기보다는 자신이 상사들에게 유능한 운영 지국장으로 인정 받는 일이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남편의 직장이 공중 분해되자, 남편은 칠레에서 다 이루지 못한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다.
나는 KBS T.V 지국장을 경멸하면서 열심히 신문의 구직란을 살폈다. '교사 모집'이 눈에 띄었다. 찾아가 보니, 이제 막 정부로부터 '어린이 집' 운영 허가를 받고, 2 세ㅡ5 세 어린이 12 명을 맡아 돌봐주는 교사를 모집하고 있었다. 내 이력서를 보더니,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 이력서는 받지 않겠다고 하면서, 당장 이튿 날부터 학교를 단장하고 있는 서반어를 쓰는 인부들을 부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내 직장 생활은 새 어린이를 모으는 일에서부터 어린이를 먹이는 일과 교육시키는 모든 프로그램까지 맡아 하게 되었다. 보조 교사를 채용하도록 허락해 주어서 참으로 다행이었고, 더우기 고마운 일은, 어린이 집(Family Day Care)은 법적으로 주인이 어린이 집에 거주하게 되어 있는데, 자기는 따로 사는 집이 있으니, 우리 식구가 와서 살아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정원도 있고, 마루도 넓고, 피아노도 있는 집에서 집세도 내지 않고 살 수가 있게 되었다. 드디어, 나는 우리 집에 피아노를 갖추게 된 것이다. 비록 내 집, 내 피아노는 아니지만, 어차피 우리 인생은 '영원한 내 집'이 있는 천국에 가기까지는 인생은 '나그네 길'이며 '장막의 삶'이 아니던가!
10 년간 미국에서 우리 직계 가족끼리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동안에 칠레에 흩어졌던 현씨 가족들도 하나님께서 잘 돌보아 주고 계셨다. 우리 현씨 가족들은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 왔고, 우리 부부도 옛 직업으로 돌려 놓으셨다. 나는 유치원 원장으로, 남편은 한국 라디오 방송국 보도국장으로 일하게 하셨다.
미국에서의 10 년 동안은 남편에게는 좋은 휴식 시간(Vacation)이었다.
초로의 나이에 남편은 현씨 문중을 일으키고자 또다시 칠레로 떠났다.
칠레 남단 칠로에 섬에서 서양에서는 처음으로 ‘무공해 자연 김’을 제조.생산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경제적 동물이라는 일본 사람도 포기했다는 ‘무공해 칠레 자연 김’에 도전한 것이다.
I.M.F.로 김 공장이 흔들릴 때 나도 변호사인 둘째 아들의 도움으로 어린이 학교를 접고, 남편의 내조자가 되었다. 흰 머리카락을 날리며 우리 부부는 오지 칠로에 섬에서 순박한 섬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세계 최초의 ‘맛있는 무공해 칠레 김’을 생산했을 때, 남편과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렸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깐, 남편은 과로로 쓸어졌다.
60 년 전 ‘대학 축제’에서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던 경상도 문둥이, 현 창섭은 나를 홀로 두고 병명을 안 지 꼭 한 달만에 ‘급성 위암’으로 급하게 나를 떠났다. 의사가 된 장남이 최선을 다했지만, 그분을 구하지 못했다.
그는 내게 올 때도 정열적으로 오더니, 나와 작별할 때도 번개처럼 떠났다. 아빠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던 막내딸 하나는 ‘아빠가 남자답게 떠나셨다’고 표현한다.
그가 없이는 못 살 것 같았는데, 어언 30 년이 흐르고 있다. 하나님이 남편되어 주시기 때문이겠지........

13

오늘이 공휴일어서인지 장미 언덕을 찾는 가족들이 많이 보인다. 나는 무릎은 짚고 천천히 일어나서 허리를 펴며 심호흡을 하였다. 아무리 허리를 펴도 굽어진 등은 펴지지 않는다.
5월의 훈풍이 불어 왔다. 사방이 초록색으로 전경이 시원하다. 남편의 비석에 새겨진 글을 다시 읽어 보았다.
“My husband, My father, My grandfather(내 남편, 내 아버지, 내 할아버지),
You are allways in our heart!(당신은 항상 우리의 마음 속에 살아 계십니다!)“
그렇다! 남편은 항상 우리 가족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
구부정하게 허리를 편 채, 나는 남편의 묘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편의 이웃들이 인사를 한다. 오른 쪽 옆에는 남편보다 젊은 여자 집사님이 계셨다. 왼 쪽 옆에는 남편보다 다섯 살 많은 장로님이 누워 계셨다. 발 밑으로는 외국인의 묘지였다. 또 머리 위로는 남편의 누이벌 되는 권사님이 계셨다. 남편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항상 사람을 좋아했던 남편은 아마도 먼저 그들에게 인사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발 밑의 외국인에게도 영어로 사교를 했을 것이다. 전날 우리 식구가 함께 낚시를 갔을 때에도 옆에 앉아 있는 미국인과 한 마디라도 더 영어로 회화 연습하고 싶어서 끝없이 서툰 영어로 말을 부치던 그였으니까........
“잠깐, 당신 옆의 젊은 여자 집사님, 예뻐? 많이 친해? 좋아, 당신이 외롭지 않아야 되니까 친하게 지내는 것, 봐 줄 게. 그렇지만, 내가 당신 옆에 눕기 전까지만이야. 아셨죠?”
나는 남편에게 다짐을 받고 싶었다.
그 때, 언덕 밑에서 장미를 가꾸던 시절의 젊고 잘 생긴 모습으로 남편이 나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반가워서 남편의 묘비 앞에 놓인 장미 다발 옆에 주저 앉고 말았다.
“장미가 아주 예쁩니다. 할머니!”
남편이 나를 보며 말했다.
“여보! 할머니라니? 나야, 나!”
나는 놀라서 외쳤다. 그러나 남편은 내 외침을 듣지 못했는지, 나를 지나쳐 그대로 언덕을 계속 오르고 있었다.
“여보! 나야, 나! 당신 마누라ㅡ!”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서 그를 뒤쫒으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다시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나서 남편의 뒤를 따르려 했다. 그런데 그가 보이지 않는다. 벌써 언덕을 넘었는가?......
구부정한 모습으로 엉금엉금 언덕 위까지 올랐다. 그래도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할머니라니? 그래, 내가 당신 없이 너무도 오래 살았지...!’
다시 엉금엉금 언덕을 조심스럽게 내려 왔다.
“어머님, 어찌 그 쪽에서 오세요?”
며느리가 나를 부축하러 뛰어 왔다.
“네 아빠가 사라져 버렸어ㅡ!”
아들에게 좀 전의 일을 얘기했다.
“엄마가 아빠를 무척 사랑하시나 보다. 환상을 보신 거에요.”
의사답게 냉철하게 말한다.
“정말 내가 천국에 갔을 때, 네 아빠가 내가 너무 늙어서 못 알아보면 어쩌니?”
정말로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머님, 우리가 전에 함께 영화 ‘타이타닉’을 보셨죠? 거기서도 여주인공이 늙어서 죽지만, 젊었을 때의 모습으로 남주인공을 만나지 않아요? 어머님도 좀 전에 보신 젊었을 때의 아버님 모습처럼, 그 때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아버님을 만나게 되실 거에요.”
참으로 지혜로운 며느리이다. 며느리의 그 말이 진실 여부를 떠나서 내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사랑스러운 내 며느리! 그래서 남편이 이 며느리를 그리도 아꼈는가 보다.
나는 아들 부부의 부축을 받으며 귀가길에 올랐다. 아들이 운전하는 뒷좌석에 앉아서, 다시 장미 언덕을 뒤돌아보았다. 아! 남편이 장미꽃 옆에 서 있었다. 장미를 가꾸던 젊고 잘 생긴 그 모습으로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두 손을 높이 들고 마주 흔들었다. 내 차가 굽은 언덕길을 돌아서 남편의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남편이 안 보이자 나는 흔들던 두 손을 모아 쥐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주님, 당신이 나를 당신 곁으로 초대하실 때, 내 모습을 변화시켜 주옵소서. 남편의 모습에 따라 저도 그 때의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그래서 남편이 저를 못 알아보는 일이 없게 해 주옵소서. 간구합니다.ㅡ”
저녁 노을이 장미 언덕에 아름답게 깃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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