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마치고 고요함을 즐기며, 일과를 반추해봅니다. 사람들과 만나는 가운데 부딪히고 공명하던 감정의 잔상들, 들끓는 욕망과, 시퍼런 분노, 어리석음과 그릇된 생각들, 자만이 기본이 되는 뽐내기, 의혹과 회한의 도가니 속에 들어서 같이 끓다가 잠시 멈추어 서봅니다.
그 가운데 ‘그리움’은 어느 것에 가까운 것일까? 탐욕에 다가설까? 어리석음에 다가설까? 잘못된 견해나 회한에 가까운 것일까?
한국에 두고 온 손자를 못내 그리워 하다가 ‘우울증에 시달리다 떠난 백수를 바라보던 연세의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리움’은 희망을 통해 삶을 지켜주던 길이기도 하고, 생명력을 소진시키는 ‘가슴에 담은 불꽃 넘치는 용광로‘이기도 합니다.
현세에 내가 사는 이제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무수한 사람들이 ’그리움‘을 통해 애간장을 녹이고 가슴을 치며 살다 떠나갔을까요? 제게도 피막을 두른 가장 단단히 밀봉된 씨앗같은 것이 있다면 그리움입니다. 섣불리 열어보였다가 숨을 조이고 가슴을 훑는 무겁고 통제불능한 터지는 파편같아서 바깥포장을 생각없이 풀어보다가 서둘러 닫아버리는 안타까움이 있다면 그 것은 그리움입니다. 하물며 노인에게 ‘그리움’이라는 것은 벗어날 수도 없고, 견딜 수 없이 쉬임없이 지글거리며 타오르는 고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치료마사지는 손을 써서 육신에 반응을 일으키는 것에만 효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처나고 손상을 입은 영을 달래고 진정시키는 기본적인 효용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것이라는 의미는 어느 경우에도 반드시 따라오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리학적인 이름이 붙은 불면증, 정서불안, 신경쇠약, 정신분열증, 우울증, 조울증, 공황장애, 쇼크, 외상에 의한 정신장애, 자폐증에 이르기까지 단지, 아우르고 진정시키는 효과를 넘어서 치료와 회복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효용이 있다는 것을 가능한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신다면 거친 삶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워낙 다양한 종류의 치료마사지를 하다보니까, 육신과 정신의 경계가, 마치 조수가 밀고 나감과 같이 그 영역이 뚜렷이 있지 않은 것을 뜻보다는 몸으로 익게 됩니다. 손톱을 깍으면 육신의 조각이 떨어져 나가고, 마음에 든 것이 정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육신의 지경이 높게 열린 것이 정신이므로 육신을 아우르면 왜 손상된 영을 돌볼 수 없겠습니까?
이번 주에 한 아드님에게서 문의전화가 왔었습니다. “어머니가 우울증이신데, 연세드신 분도 치료마사지를 받을 수 있나요?” 이 나이는 현생의 짧은 순간의 세월을 살아내면서 공간과 함께 남기는 흔적일 뿐입니다. 특히 우울증은 아이에서 노인까지 나이와 관계없이 찾아드는 것이고, 주저하다가 시기를 잃으면, 좀 더 세월이 가고 ‘그리움’과 회한이 함께할 수도 있으므로 ‘때’를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때’는 치료마사지로 회복할 수 있는 치료기간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