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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 나이가 들면 왜 말이 많아질까

Los Angeles

2013.06.10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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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편집팀장
5월 말 시애틀 여행을 했었다. 5~6년쯤 젊은 부부 가족과 함께였다. 그 부부가 서둘러 표도 끊고 숙박 예약도 해 둔 덕에 꽤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다. 떠나기 전 여기저기 뒤져 가볼만 한 곳들을 열심히 알아봤다. 어디가 좋을까, 어디를 꼭 들러봐야 할까 하고.

지켜보던 아내가 한마디 툭 던졌다. "당신은 아무 말 말고 그냥 있는 게 좋겠어요. 그쪽이 어련히 알아서 준비했겠어요." 그리고 덧붙였다. "나이 많은 사람이 자꾸 의견 내면 젊은 사람들이 싫어해요. 다음엔 같이 가자고도 안할 거예요."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내가 벌써 그렇게 되었나. 아무리 좋은 조언이나 충고도 자칫하면 잔소리, 군소리가 되고 심한 경우 헛소리 취급을 받고 만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렇지만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나도 연배의 사람이 이러자 저러자 자꾸 의견을 내 놓을 땐 그다지 편치가 않았으니까.

한 가지 더. 일전에 한국에 갔을 때다. 두어 시간 KTX 열차를 탈 일이 있었다. 건너편 자리에 초로의 할아버지가 앉았는데 옆자리 젊은이에게 잠시도 쉬지 않고 말씀을 하신다. 왕년의 이야기, 외국 있는 자식 자랑 등 장황하기가 이를 데 없다. 목소리까지 커서 안 들으려 해도 들려오는 얘기를 한 시간쯤 듣고 있자니 은근 고역이었다. 나도 나이가 들면 저렇게 되려나, 살짝 걱정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입을 닫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그렇다. 상대방 얘기는 듣지 않고 늘 본인 이야기만 하는 분들 역시 대개는 나이가 더 많은 쪽이다.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것도 나이 든 사람들의 특징 아닌 특징이다. 왜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질까.

살아온 세월이 길어 쏟아 놓을 '꺼리'가 쌓이고 넘쳐서 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대화 상대가 없어 심심하던 차에 어쩌다 기회가 생기면 '이때다' 하고 구구절절 늘어놓는다든가.

좀 더 과학적으로 접근해서 노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뇌세포는 30세를 기점으로 노화가 시작된다고 한다. 40~50대가 되면 그 속도가 갑자기 더 빨라져 방금 한 일인데도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돌아서면 깜빡깜빡하는 증상이 나타난다. 했던 말을 자꾸 되풀이하기 시작하는 것 역시 50세 전후부터라고 하니 전혀 일리가 없는 주장은 아니다.

그렇다고 노인의 다변을 나이에서 오는 기억력 감퇴 탓으로만 돌릴 일은 아닌 것 같다. '브레인 파워-뇌를 젊게 하는 8가지 습관'(마이클 겔브, 켈리 하월 공저)이란 책을 보면 나이가 들어도 얼마든지 기억력을 유지할 수가 있다고 한다. 몸을 열심히 돌보고 가꾸는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유연성과 탄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기억력도 노력을 통해 충분히 향상시킬 수 있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낯선 것을 피하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열심히 배운다든지 해서 두뇌에 자극을 계속 주면 얼마든지 기억력 감퇴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시애틀 충격' 뿐 아니라 했던 말 또 한다느니 하는 말을 요즘 들어 듣기 시작하면서 은근히 걱정하던 나로서는 반가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나이가 들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는 말도 있지만 그렇다고 말을 안 하고 살 수는 없다. 문제는 필요한 말만 어떻게 적절히 잘 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 그 경계선을 잘 판단하는 것이 노년 지혜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문득 성경의 가르침이 생각난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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