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기독교 신학의 흐름을 설명하면서 칼 바르트만을 소개하고 폴 틸리히를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우리 몸에 오른손만 있고 왼손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지난번에 소개한 바르트의 신학이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에 접근하는 모든 인간적 방법에 대한 강력한 부정의 선언이었다면, 틸리히의 신학은 이와는 정반대로 해석될 수 있다. 그는 존재의 불안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는 ‘종교성’을 통해 존재 자체인 하나님과 상호 연관될 수 있는가에 대해 끊임 없이 질문을 던졌다.
20세기 최고의 문화 신학자였던 틸리히는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며 종교는 문화의 본질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빠른 속도로 세속화되고 있는 서구문명안에서 어떻게 기독교가 종교적 실제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신학적 모색을 시도했다.
틸리히가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종교적 성찰을 하게된 것은 그가 살았던 격동의 세월때문이었다. 1886년 독일의 루터란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틸리히는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일차 세계대전동안 군목으로 참전했다. 전쟁의 비참함을 실제로 체험한 틸리히는 이 때부터 이미 구체적이며 실존론적인 고민들을 그의 신학적 탐구를 통해 풀어가기 시작한다.
군 복무를 마친 다음 해인 1919년 틸리히는 베를린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한다. 그가 대학교수로서 첫 해에 발표한 ‘문화의 신학에 대한 견해’라는 논문은 틸리히가 평생을 통해 씨름해야될 연구 과제였다. 그는 1924년부터 말부르크 대학을 거쳐, 1929년부터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틸리히는 기독교 사회주의적 입장에서 히틀러를 공격하는 글을 발표했다는 이유로 강단에서 추방당했다. 이 사건으로 결국 그는 자신의 조국인 독일을 등질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틸리히는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더 니버의 주선으로 1934년부터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1955년 은퇴할 때까지 미국에서 후진 양성에 힘쓰게 된다.
유니온 신학교 초창기 시절에 틸리히의 신학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그의 신통하지 않는 영어발음 때문에 잘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표작으로 간주되는 조직신학 3권이 잇달아 출간되면서 (1951-63), 그는 일약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로 떠올랐다. 유니온신학교에서 은퇴한 뒤에도, 틸리히는 하바드 대학(1955-62)과 시카고 대학(1962-65)에서 초빙을 받아 연구와 강의를 계속한다.
특히 마지막으로 재직했던 시카고 대학에서 종교사학자 멀치아 엘리아데와 가졌던 학문적 교류를 통해 틸리히는 기독교 조직신학의 새로운 방향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의 마지막 논문인 ‘조직신학자를 위한 종교학의 중요성에 대하여’에서는 자신이 평생동안 연구해온 종교적 상징체계의 의미를 보다 광범위한 세계종교와의 연관성 속에서 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기독교 신학자가 다른 세계종교의 상징체계를 포함하는 조직신학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은 참으로 심각한 도전이었지만 틸리히는 이런 가능성만을 남겨둔 채, 1965년 운명했다.
틸리히에 의하면 ‘궁극적 관심’으로서의 신앙은 우리들의 존재론적 질문 (Ontological Questions) 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항상 비존재(Non-being)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존재의 의미에 대해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게 된다. 과연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존재 자체로서의 (Being-itself) 하나님은 우리들의 이러한 궁극적 관심에 대한 신학적 대답 (Theological answer), 그 자체다. 하나님이 바로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의 존재와 상호연관 된다. 이것이 바로 틸리히의 유명한 ‘상호연관의 방법(The Method of Correlation)’이다. 인간이 존재의 의미에 대한 실존적인 질문을 던질때, 존재자체이신 하나님은 종교적 상징을 통해 인간에게 대답하시는데, 이를 ‘상호 연관’이란 표현으로 설명한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무한한 질적차이를 선언하였던 바르트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의 신학적 접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