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맨들의 성취감은 기업의 이윤을 통한 개인과 종업원의 행복 추구로 집약될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한 경쟁의 매출 증대, 이윤 극대화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이 사람, 윤태업사장(63)은 행복된 삶이 비즈니스의 어떤 목적보다도 우선한다는 원칙을 한번도 저버리지않으면서도 행복을 만끽하고 있어 성공한 비즈니스맨임에 틀림없다. 매출증대, 이윤극대화같은 피말리는 도전없이도 비즈니스를 통해 행복에 겨워 인생이 즐거운 사람, 윤태업사장. 그를 만나 또다른 비즈니스 맨의 성공스토리를 들어본다.
“세계에서 최고가는 시계 수리 기술자, 이게 어렸을적 꿈이었어요. 이걸 이룬것만도 행복한데 궁핍하지않게 생활할수 있지, 남들이 못하는 취미생활 싫컷하지, 두 딸의 행복한 모습, 또 두 딸로 부터 받는 효도로 꿈인지 생시인지 어리둥절할 정도지 이러면 가장 행복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비즈니스의 크기나 사업장의 겉모습, 매출 규모 따위의 기준으로 봐서는 도저히 성공한 비즈니스맨으로 단정할수 없을것 같은 윤스시계의 윤태업사장은 그러나 진정 행복한 비즈니스 맨이다. 소위 성공했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많은 행복지수를 느끼고 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일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을 엄격하리만치 구분해 생활하고 있는데다가 흥미진진한 취미생활의 지속을 통해 심신이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는 것. 윤사장의 비즈니스 얘기보다도 다양한 취미생활을 들여다보면 이해가 빠르다.
취미로 수십년 해온 바둑은 프로 수준. 기원을 찾아가거나 밤을 새우는 일은 전혀없이 친구만나 가끔 하는 수준임에도 공인 아마 초단.
중학생 시절부터 연마해온 탁구는 웬만한 사람에겐 한번도 져 본적이 없는 학생 시절 선수권 소유자.
낚시는 바다건 민물이건 나가면 월척을 놓치지않는 ‘꾼’ 수준.
주 1회는 반드시 부인과 함께 라운딩을 갖는 골프는 ‘짠’ 핸디 9. 알래스카로 하와이로 칸쿤으로 부인과 동행하는 골프 장거리여행도 1년에 한번 이상은 기본.
사진촬영은 중학생때부터 생활속에서 익혀온 수준급.
여기다가 독실한 신앙생활은 윤사장을 오늘까지 바른 길로 인도해온 인생의 버팀목.
이만하면 윤사장의 행복지수를 쉽게 가늠할만하다.
이런 행복지수를 가능하게 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경제력이 따라줘야 하는건 기본. 윤사장은 자신이 누리는 행복지수를 유지하는데는 전혀 문제없을만큼, 아니 오히려 풍부하리만치 비즈니스는 운영된다고 설명한다.
윤사장은 일제치하 시절 일본에서 태어났다. 해방직후 부모를 따라 부친의 고향땅 경주로 귀국했던 윤사장은 넉넉치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공부잘하던 중학교 1년생 윤태업소년은 어려운 가정형편도 돕고, 도회지에서 공부도 하리라는 꿈을 안고 부산서 시계점을 운영하는 형님에게로 갔다. 밤엔 야간 학교 학생으로, 낮엔 시계점 점원으로 일했다. 유난히 손재주가 많다는 얘기를 듣던 윤소년은 수년만에 시계고치는 ‘도사’가 되었다. 야간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윤소년은 시계 고치는 재미로 시간가는줄 몰랐다.
“당시엔 고치지않은 시계를 찬 사람이 없을 시절이었습니다. 세계에서 시계를 가장 잘 고치는 사람이 되자고 맘먹은 그때부터 평생 이길을 가게 될줄은 몰랐지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한 길을 걸어온것이 나의 행복지수를 높이는 가장 큰 배경이 되었더라구요.”
눈에 보일듯 말듯한 크기의 시계 부속을 쇠줄로 갈아서 만들기도 하던 시절, 시계 수리에 대해선 부산 최고의 줏가를 높혔던 동아시계점의 실질적인 업주까지 된 윤사장은 시계 수리를 손밖에 놓지 않기 위해 늦은 나이이긴 했지만대학도 야간을 택해 동아대학에 입학했다. 군에 입대해서도 전무후무한 사단본부 시계수리공으로 복무했을 정도로 윤사장의 시계 수리 기술은 탁월했다. 제대후 형님의 시계점을 인수한 윤사장은 시계 판매는 물론 시계 수리공으로 이름을 날렸다. 수리 불가능 진단이 떨어진 시계라도 윤사장 손에 오면 정확한 시계로 변신되었던것. 시계수리부문 국가기능검정 기능사 자격 1호를 갖고 있기도 한 윤사장은 군시절 무려 360통의 편지를 써 감동시킨 지금의 부인 경자씨와 나이 30에 결혼했다.
“간호사였던 아내가 74년 취업 이민으로 도미함에 따라 미국엘 왔어요. 도미 다음주부터 다운타운 라도 딜러 시계점에서 일하게 됐어요. 주급으로 당시엔 괜찮은 1백50달러를 받았습니다. 일이 몰려왔어요. 보너스도 두둑히 받곤 했는데 2년뒤쯤 오메가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어요. 스위스본사에서 운영하는 미국내 서비스 센터였는데 주급 3백50달러를 제의했습니다. 라도에서의 모든 약속을 다 지킨 후 오메가로 옮겼지요.”
당시로서는 적지않은 월급생활자에, 파트타임으로 오메가를 제외한 다른 고급 시계의 줄이은 수리요청등으로 윤사장은 이미 80년대초에 이민생활의 기반을 다졌다.
1980년, 한인타운의 골격이 잡혀갈 무렵 윤사장은 8가와 카탈리나에 윤스시계점을 차린다. 그리고 한창 유행이던 귀국선물 붐을 타고 시계를 참 많이 팔았다. 타운, 아니 남가주의 고급시계 수리도 거의 독점하다시피 일이 많았다.
92년 LA폭동. 윤사장에겐 지나온 시간들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여생을 살만한 기반도 닦여져 있는데다가 경제력의 과다가 행복의 과다 기준이 될수는 없다는 생각을 한 윤사장은 사업체 규모를 줄여 ‘수리 전문점’으로 정스백화점내에 조그만 ‘귀퉁이 가게’를 열어 옯겼다.
“건강이 있는한 취미생활은 할만큼 일은 하면서 행복을 갖는 비즈니스, 이런 사업장을 갖고 있는 사람 흔치 않잖아요. 내 가게가 그런 사업장입니다.”
비즈니스의 규모로만 따질수 없는 성공 비즈니스맨의 측정 잣대. 윤태업사장이 완벽한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알래스카 주정부 환경보호국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는 첫 딸 엘림양, 패사디나 아트센터 교수로 재직중인 둘째 딸 살리나양 모두가 주류사회에서 우뚝 선 선두주자라는 것도 윤사장의 행복지수를 높이는 요인임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