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청빙의 출발은 상식과 예의
이기적 개념은 상식의 결여를 초래한다.교계의 목회자 청빙 실태가 그렇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일련의 논란을 들여다 보면 과정이나 절차에 있어 기본적인 상식과 예의마저 실종됐다.
청빙 이면에 얽히고 설킨 복잡한 문제에 대한 분석과 대안은 나중이다. 청빙은 각 교회가 처한 상황과 환경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때마다 동일한 기준이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 다만, 상식과 예의는 교회든 사회든 모두가 기본으로 소유할 수 있는 공통의 개념이다. 최소한 기본만 지켜졌어도 여러 청빙 논란은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었다.
교계의 굵직했던 청빙 논란을 수차례 취재해왔다. 대개 양상은 비슷하다. 청빙 소식을 갑자기 맞닥뜨린 교회는 혼란에 빠진다. 실제 취재를 해보면 교인뿐 아니라 부교역자, 당회 장로까지도 "너무나 당혹스럽다.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담임목사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대답이 일반이다.
반면 청빙을 제의한 교회는 대부분 "기도하면서 제대로 절차를 밟았다"는 주장이다. 일단 '내 교회'가 먼저다. 상대 교회는 영문도 모르고 혼란에 빠졌는데 공식 발표는 물론이고 뻔히 통과될 형식적인 청빙 투표까지 진행시켜 버린다.
이쯤 되면 청빙은 사실상 끝났다고 봐야 한다. 한 교회는 충격 속에 울며 겨자먹기로 목사를 보내야 하고, 동시에 다른 교회는 박수를 치며 환한 웃음 가운데 투표를 마감시킨다. 배려나 상생의 정신은 없다. 보통 이런 일은 청빙을 제의한 교회와 대상자(목사)간의 물밑 합의가 없다면 있을 수 없다. '게릴라식 청빙'의 폐해다.
몰래 합의된 청빙이 이상한 결과를 낳는 경우도 있다. 청빙이 확정됐다며 언론에 공식발표까지 했는데 당사자가 사흘만에 뒤엎은 적도 있다. 투명성이 결여된 과정이 양쪽의 경솔한 판단을 부른 셈이다.
상대 교회가 당황하든 말든 일방적으로 청빙할 목회자를 발표하고 온 교회가 공식적으로 이름까지 불러가며 기도를 하기도 한다. 결국 당황한 당사자가 웹사이트에 청빙을 거듭 거절했다는 의사를 표명하면서 논란이 일단락 됐다.
개척한 지 2주도 안된 목사에게 청빙을 제의했는데 성사가 됐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청빙 제의를 수락한 뒤 갑자기 사임을 통보한다거나, 인사도 없이 교회를 떠나는 '목자'는 양떼에 대한 책임감을 상실한 것이다.
심지어 이웃교회 목사를 청빙하면서 논란이 일자 "그럼 우리가 그 교회 가서 목사님을 보내달라고 해야 합니까"라는 말에 교인들이 웃음으로 맞장구치는 게 현실이다.
지난주 커버스토리로 LA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주최한 청빙 문제에 대한 좌담회를 보도했다. 아주 상식적인 내용이 오고 갔다. 한 발 뒤로 빠져서 '나' 또는 '내 교회' 중심의 렌즈를 빼고 청빙 문제를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최소한 상식과 예의를 지키는 것이 건강한 청빙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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