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이 발발해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맥아더는 그 이튿날, 북한군과 소련 전투기의 기습 위협을 무릅쓰고 도쿄에서 비행기로 서울 상공에 날아와 한강 방어선을 시찰했다.
맥아더는 한강 상공을 시찰하면서 이미 낙동강 최후 방어선 구축과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할 만큼 전략이 뛰어난 장군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워싱턴의 군 수뇌들이 모두 반대할 정도로 성공률이 희박했던 작전이었다. 하지만 맥아더의 탁월한 지휘력으로 작전은 성공했고, 그는 한국을 침략군으로부터 구해준 '은인'으로 추앙받게 됐다.
또한 맥아더 장군은 한국을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준 은인으로 각인돼 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61세의 나이로 자원해 예비역에서 현역으로 복귀한 맥아더는 미극동군 총사령관이 되어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의 덕분에 한국 등 일본의 침략하에 있던 나라들이 해방됐다.
그렇다면 맥아더는 일본인에게 나라를 패망케 한 원수인가? 아니다. 맥아더는 일본인들에게도 '은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트루먼 대통령이 45년 8월 초 일본에 원자탄 투하를 결정할 때 미 공군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오사카 세 도시를 폭격대상 지역으로 정했다. 그러나 일본의 사정을 아는 맥아더의 주장을 따라 문화유산이 많은 오사카는 원폭투하에서 제외됐다.
종전 후 맥아더 장군은 태평양지역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면서, 일본의 '탈(脫)군국주의' 정책 실현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선 일본천황으로 하여금 '인간선언'을 하도록 했다. 또한 일본 군국주의의 사상적 근거인 '신토(神道)'를 무력화시키고, 신화교육 등을 금지시켰다. 대신 기독교 성서를 대량으로 유포시켜 종교를 통한 일본인의 의식 개조를 시도하기도 했다.
탈군국주의 정책의 하나로 사회주의와 노동운동도 묵인해 주었다. 전쟁때 군국주의 체제의 버팀목이 됐던 재벌들을 해체하고 자본가들이 군대와 유착되는 것을 금지시켰다. 공직자 중 전쟁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2만명을 대거 해고하기도 했다.
그런데 '군국주의 일본'을 '민주주의 일본'으로 개조하려는 맥아더의 개혁 드라이브가 한국전쟁의 발발로 좌절되고 말았다.
맥아더는 미군과 유엔군 사령관으로 한국전쟁을 총지휘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야했다. 막대한 전쟁 물자를 조달하게됨으로 일본의 해체됐던 재벌들은 다시 일어섰다. 일본인들의 정서는 공산세력의 침략 위협에 맞서 보수화의 길로 복귀됐다.
맥아더 장군의 일본통치에서 가장 중요한 '실책'이 하나 있다. 일본 군국주의의 중심인 '천황제'를 폐지시키지 않은 것이다. 그때 맥아더 장군은 전쟁의 최고 전범인 천황을 사형시킬 수 있었고, 또한 천황제 폐지를 단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만약 천황을 처형하면 일본인 1억 명이 할복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천황제를 유지시켜 주었다.
이런 이유로 맥아더는 일본인들에게 '마지막 쇼군'이라는 칭송을 들으며 은인이 됐다. 그때 맥아더가 용단을 내려 천황제를 폐지하고, 일본을 완전한 서구식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했더라면 오늘날 아베나 아소같은 정치인들이 활개칠 자리는 없어졌을 것이며 극우 망언 시리즈는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