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기만 한 바비 인형의 세계, 꿈은 모두 이루어지는 가식의 세계를 보여줬던 디즈니 영화는 최근 들어 퇴각을 거듭했다. 디즈니는 스스로의 빈자리를 극사실 애니메이션으로 채웠지만 옛 영광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디즈니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빌리기 시작했다. 자회사인 미라맥스가 1999년 ‘원령공주(Princess Mononoke)’을 수입한데 이어 올 해엔 직접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 수상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Spirited Away)’를 들여왔다.
애니메이션의 종가임을 자부하는 디즈니의 이런 행보를 생각할 때 ‘센과…’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놓친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
그건 테크놀러지에 몰두하면서 잊었던 자연을 통한 상상력이다. ‘센과…’에서 상상의 날개는 자연, 특히 물에서 솟아오른다. 비와 온천, 바다로 이어지는 물의 이미지는 모든 것에 정령이 있다는 애니미즘을 바탕으로 하고 거기엔 자연파괴라는 환경위기도 흐른다. 악취가 코를 찌르는 오물신이 토해내는 고철, 히치로를 돕는 하쿠가 강의 정령인 용이라는 사실은 ‘센과…’이 물의 영화라는 느낌을 준다.
물의 이미지는 그러나 이 영화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일본의 월트 디즈니로 불리는 미야자키 감독은 10세 소녀 치히로의 모험을 통해 여러 겹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그의 상상의 세계에서 어른은 채울 수 없는 탐욕과 허기에 뒤뚱거리는 돼지다. 이사가던 날. 길을 잘못든 치히로의 부모는 딸의 만류를 무시하고 어두운 터널을 넘고 주인없는 음식을 먹다가 돼지로 변한다. 치히로 덕에 인간으로 돌아온 부모는 어디갔었냐며 되려 딸을 탓한다.
당연히 상상의 세계에서 돼지같은 어른들은 빠진다. 10세 소녀 치히로만 터널 너머 온천장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다.
마녀 유바바가 주인인 이곳은 밤이면 8백명의 신들이 몰려와 향연을 벌인다. 치히로는 하쿠와 보일러실을 책임지는 가마할아범과 종업원 린의 도움으로 부모를 구할 순간을 엿본다. 생과 사를 운행하는 편도 열차를 타고 유바바의 언니인 제니바를 만나 부모와 하쿠를 구할 때까지 치히로가 만나는 인물들은 물에 사는 동물을 연상시킨다. 사람의 형체를 한 신들도 얼굴은 매기 같은 물고기를 닮았다. 사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얼굴없는 요괴와 오물신은 예쁜 것만 보여주진 않는다. 오물을 질질 흘리거나 사람을 삼킨다. 세상의 어두운 면에 눈감지 않는 것이다. 요괴와 오물신이 싫다해도 신발을 내주는 숯검댕이와 외발로 뛰어와 밤길을 맞아주는 전등에선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일하지 않는 자는 이곳에선 필요없다”거나 부모를 구한다는 효도 강조 등 교훈적 설정에도 터널 너머는 생기 넘치는 아이들의 세계다. 그곳에서 물의 정령과 사귀는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