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탈북자들이 베이징의 외국공관으로 뛰어드는 모습들을 심심찮게 접하며 떠올린 말이 있었다.
‘도피성(逃避城)’과 ‘소도(蘇塗)’다.
신원태 <부국장>
도피성은 기독교의 구약성경 ‘여호수아'서에서 소개되는 특별지역이다.
여호수아가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분배하면서 레위지파 마을 중 6곳을 도피성으로 지정했다는 얘기다.
실수로 살인했거나 잘못 누명을 쓴 사람이 시비 가릴 틈 없이 흥분한 피해자 측으로부터 보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피신하는 장소였다.
유사한 제도로 고대 한국에는 소도가 있었다.
삼한시대 제사장 천군(天君)이 관할하는 신성지역으로, 국법이 미치지 못해 죄인이 도망쳐 숨어들면 잡아갈 수 없었다.
살길이 막막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은 탈북자들은 그러나 북한 공안이나 중국 군경의 추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들이 완전한 자유를 얻는 가까운 방법이 ‘치외법권’ 지역인 외국공관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는 탈북자 2명이 천신만고 끝에 미국에 밀입국, INS의 망명 허락을 받아냈다는 의외의 소식이 들렸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이야말로 가장 전형적인 현대판 ‘도피성’ 같다.
세계 각국에서 망명객들이 들어오고 미국은 이들을 보호하는 이민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범죄자들에게도 미국은 피난처가 되고 있다.
한국 경찰청은 최근 10년간 해외도피 사범 701명 중 43.7%인 306명이 미국으로 도피했다고 밝힌 바 있다.
살기 힘들어, 또 자녀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삶의 터를 옮긴 사람들에게도 ‘도피’라는 딱지를 붙이는 경우도 있으니 미주 한인사회는 어떻게 보면 도피자들의 사회, 즉 ‘도피성’의 하나에 다름 아니다.
미주 한인들에 대한 본국 사람들의 다소 부정적인 시각이 여기서 발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도피성과 소도의 역사로 되돌아가 보자. 기록을 비교해 보면 겉모양은 비슷해도 다른 점이 있다.
도피성에는 휴머니즘이 내비친다.
억울한 백성을 구제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다른 한편 실수가 아닌 ‘짐짓 살인한 자’는 끌어내 처벌자의 손에 넘기라고 하고 있어 적당한 편승은 용납하지 않는다.
반면 소도에는 천군의 절대 파워가 더 크게 느껴진다.
국법이 먹히지 않는 곳이라 도적과 강도가 들끓었다 한다.
한국에서 ‘IMF 사태’ 후 금융구조조정에 투입된 ‘공적자금(公的資金)’은 가히 천문학적이다.
정부가 갚아야 하는 부채 원리금이 현재 212조1천억 원, 여기서 회수 가능한 37조5천억을 빼고 174조6천억 원이 국민들의 생짜부담으로 귀착될 것이라고 한다.
엄청난 돈이 정부 지시로 어지럽게 움직이는 와중에 상당한 돈이 엉뚱한 곳으로 ‘샜을’ 것으로 추측된다.
‘눈 먼’ 돈 챙겨 ‘세상이 바뀌어도 살아갈 만한’ 재산을 만들어 놓은 사람이 있다면 이를 숨길 만한 안전한 장소가 필요해진다.
미국 또는 미국의 한인사회가 가장 좋은 도피처가 될 것이라고들 말한다.
시카고를 비롯한 미주 한인경제가 요즘 어렵다.
그런데 본국에서 자금이 많이 들어오는 지역은 그래도 활기가 여전하다는 말도 들린다.
본국 자금이 미주 한인경제 발전의 중요한 동력이 된다는 이야기다.
시카고에서도 한인경제를 키우려면 사람과 돈이 많이 유입돼야 한다고 한다.
틀리지 않은 말이다.
그래도 옥석을 구분하고 싶다.
시카고가 ‘도피성’은 될지라도 ‘소도’가 되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