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씨는 범아시아의 성씨를 표방하는 것이 특징이다. 원조는 중국의 강태공. ‘중국 구씨사기’에 따르면 강태공의 후손들이 분파해 강·여·구·정·제·환·최·노씨 등 8개 성이 되었으며 그중 구씨들은 산동성 창락현에 위치한 영구라는 곳에 정착했으므로 영구의 구(丘)를 성씨로 삼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렇듯 고대 중국에서 시작한 구씨는 본토를 제외하고 대만에 약 40여만명이 살고 있으며 싱가포르와 홍콩·말레지아·인도네시아·태국·필리핀 등 동남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 산재해 있다.
중국 구씨 중 일부는 丘(구)자가 아닌 邱(구)를 성자로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중국의 성현 공자의 이름이 丘자였기 때문에 청조에서 성현의 이름을 성자로 삼는 것은 불경스럽다하여 丘자 대신 邱를 성으로 사용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나 청조가 망한 후부터 중국 본토의 구씨 대부분은 丘자로 복성했다.
또 현재까지 邱씨를 성씨로 하는 가문에서는 아버지의 성자가 邱자라 해도 그 자손들은 호적에 丘자로 등재하고 있다.
세계 구씨 종친회는 전세계 구씨의 친목을 위해 조직된 국제기구로 대만에 그 본부를 두고 있다.
지난 79년부터 매년 10월에 대만에서 세계 구씨 종친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지난 81년에는 중국 구씨 종친회에서 돌로 된 사자 한쌍을 한국 구씨 종친회에 기증하는 등 교류가 활발하다. 또 세계 구씨 종친회가 벌이는 장학사업의 혜택으로 한국의 구씨 젊은이들이 대만에서 공부하고 있다.
우리나라 구씨의 시조는 구대림장군. 한국 평해구씨사관에는 “구대림 장군은 당나라 고종 3년(신라 문무왕 3년)에 우리나라 황씨의 도시조인 황락장군과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가다가 중도에 풍랑을 만나 경북 울진군 평해에 표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구장군과 황장군은 평해의 월송정에 배를 대고 구장군은 해안의 남쪽 언덕 미포에 살면서 구씨의 시조가 되었고 황장군은 북쪽 언덕의 조산이라는 곳에 터를 잡아 황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예로부터 “평해 구씨와 황씨는 친형제처럼 우의가 두터웠으며 성이 다른 일가라 하여 혼인까지 금해 왔다”고 평해 구씨 대종친회측은 밝힌다.
시조 구대림 이후 우리나라 평해 구씨의 자손들은 번성하지 못한다.
황씨가 한국의 대성으로 번성한데 반해 구씨가 희성의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은 이같은 이유 때문인 듯하다.
기록상 평해 구씨의 1세로 전해지는 인물은 고려 공민왕 때의 구선혁. 그는 당시 이방실 장군 등과 함께 홍건적을 토벌, 벼슬이 민부상서에 올랐다.
고려말 구천우는 평해 구씨의 뿌리를 굳게 내린 인물. 평해 구씨 2세인 그는 춘호(지의금부사), 춘경(판사), 춘서(랑장), 춘보(병조참의) 등 4형제를 낳아 가문의 번성을 이룬다.
이들 4형제 중 구춘보의 아들 차숭은 조선 세종때 영해부사를 역임했으며 후에 병조판서에 중직되었다.
평해 구씨는 조선조에 모두 6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이중 대표적인 인물이 성종 때의 명신 구종직. 그는 세종 26년 문과에 급제, 공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에 올랐다. 문장이 뛰어나 경학과 역학의 대가로 오늘날까지 그에 대한 많은 일화가 전한다.
그가 문과에 오른 뒤 교서관에 정자라는 신분으로 근무할 때 하루는 숙직을 하다가 경회루의 경치가 절경이라는 말을 듣고 경회루를 구경하던 중 때마침 산책을 나온 왕과 마주쳤다.
왕은 그의 신분과, 밤중에 경회루에 나와있는 까닭을 묻고 ‘경전’을 욀 줄 아느냐고 물었다. 이에 종직이 ‘춘추’ 한권을 줄줄 내리 암송하니 왕은 크게 감탄하고 이튿날 그를 부교리에 임명했다. 교서관의 정자라면 9품직의 말단 벼슬이다.
그런데 그를 하루아침에 종 5품직인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했으니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 등 이른바 3사의 반대가 없을 수 없었다. 그러자 왕은 3사를 모두 불러 놓고 ‘춘추’를 모두 외우게 했으나 아무도 구종직을 따르지 못했다고 한다. 구종직은 그 후 벼슬이 1품에 이르렀으며 그의 두 아들도 각각 직제학, 사재정을 지냈다.
구치곤은 조선 성종 때의 명신. 그는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면서 어전에서 왕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관원의 인사 등에 관한 부조리를 서슴없이 진언했던 명신으로 유명하다.
또 인재 등용과 형사제도의 개선, 부패 관원의 문책, 승정원 업무의 활성화 등 요즘으로 치면 ‘서정쇄신’의 제도 개선을 진언했다. 특히 “수도 생활이 문란한 엉터리 승려들을 군대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기발한 사회정화론을 내놓아 이채를 띤다. 염불보다 잿밥에만 뜻이 있는 건달승려가 번성, 전국을 돌며 집집마다 공양을 요구하는 등 민폐가 심하니 이들을 몽땅 군대에 끌어넣어 정신개조를 위한 순화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순화교육을 연상케도 한다.
구영안은 예종 1년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했으나 벼슬에 큰 뜻을 두지 않고 음양과 풍수, 의술, 선도, 불도 등 연구에 전념, 일가를 이루었던 수재였다. 그러나 그는 ‘여자문제’로 아깝게 대성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조실록은 그의 여자문제에 따른 스캔들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생원 구영안이 그의 아내 신씨를 뚜렷한 이유없이 버리자 처가에서 사헌부에 고소장을 냈다. 진상조사에 나선 사헌부는 이혼 사유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두 사람이 다시 결합하도록 합의를 주선했다. 그러나 구영안은 이에 따르지 않고 이문의 딸과 혼례를 치렀다. 이에 사헌부는 왕에게 진언, 구영안을 변방의 군인으로 보내 죄값을 치르도록 했다’ 남존여비와 여필종부로 대표되는 신분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재미있는 기록이다.
일제의 암흑기와 해방으로 이어지는 격동기에 구씨 가문이 배출한 인물로는 구덕확이 있다.
1925년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26년 동안 동생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을 해 상해임시정부에서 김구, 이동녕 등과 독립운동을 했으며 해방후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하다 제2대 국회의원이 됐지만 6·25동란때 납북됐다.해방 후 평해 구씨는 대문장 구종직 후손답게 많은 석학을 배출했다. 대학 등 학계는 물론 언론계 등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1985년 현재 1만5백50명으로 인구 성씨 순위는 1백1번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