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칼럼] 서울을 감싸고 있는 4대산과 4대문
Bernard Kim 칼럼
4대산 : 낙산(東), 인왕산(西), 남산(南),북악산(北)으로 이어지는 18.7km의 서울 성곽
4대문 :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정문(북대문)
* 4대산
1. 낙산(駱山) : 동쪽의 좌청룡(左靑龍)
서울 종로구•성북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의 모습이 낙타 등처럼 볼록하게 솟았다고 하여 낙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 산이다.
낙산은 역사적으로 서울의 형국을 구성하던 산의 하나로 풍수지리상 주산인 북악의 좌청룡(左靑龍)에 해당되어 서편의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과 대치되면서, 조선왕조의 수도로서의 한양 입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한양의 경계로서 능선을 따라 성곽이 축성되었다.
2.인왕산(仁王山) : 서쪽의 우백호(右白虎)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있는 산인데,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조선조의 명산으로 진달래가 유명하고 약수터가 많기로 유명하다.
3.남산 (南)
목멱산•인경산 등으로도 불렸으며, 기반암은 화강암 이다.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 북쪽의 북악산과 함께 서울의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다.
조선 태조 때에 이 산들의 능선을 따라 도성을 축성했으나 현재는 성곽의 일부만 남아 있으며, 산 중턱 아래와 위는 각각 완경사와 급경사를 이루며, 소나무•아카시아 등이 이루는 경관이 훌륭 하며, 수도 서울의 중앙에 위치하여 산 정상에서는 사방으로 펼쳐진 서울의 시가지를 둘러볼 수가 있다
1910년에 처음으로 시민공원이 되었으며, 고종의 친필 비석인 '한양공원'(漢陽公園)이란 공원표지는 통일원 청사 옆에 보존되어 있으며, 산 정상에는 조선시대 이래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던 국사당과 통신제도에 중요한 구실을 한 봉수대가 남아 있다.
90년대 초반부터 시작 된 자연보전 사업으로 소나무 1만 2,500그루를 심었으며, 남산공원 내 개인 단독주택 등의 건축물을 철거하고 시민들의 이용 편의를 위하여 진입로를 정비함으로써 남산의 제모습 찾기 사업은 마무리되었다
4.북악산(北岳山)
북악(北岳)•백악(白岳)•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한다.
역시 기반암은 화강암이다. 인왕산•북한산•낙산•남산 등과 함께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으며, 서울 북쪽 경복궁의 진산이ㅣ다.
1395년 시축한 서울성곽(사적 제10호)의 기점으로서 북악산에서 낙산•남산•인왕산의 능선을 따라 쌓았는데, 정도전이 성 주위를 측정한 뒤, 97구로 나누었다.
4대문
사대문의 이름은 유학의 덕목인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에서 따왔는데,
이에 따라 동서남북의 사대문은;
흥인(仁)지문,
돈의(義)문,
숭례(禮)문,
숙정문 (지'智'를 대신하여 정'靖'을 썼다)이다.
마지막 信은 고종 때 한양의 중심이었던 “보신각”의 이름에 쓰였다.
1.흥인지문(興仁之門) : 동대문
동대문(東大門)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1396년 태조에 의해 처음 지어졌으며, 먼 훗날 조선 총독부가 흥인지문을 숭례문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상징물로 여겨 1934년에 보물 2호로 지정하였다는 주장이 있기도 한 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른 사대문의 이름이 석 자인 데 반해 흥인지문만 넉 자인데, 이는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가 약하다고 하여 그 기운을 북돋기 위해 넉 자로 지었다고 한다.
2.돈의문(敦義門) : 서대문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서쪽방향의 정문이다.
한양 도성 서쪽의 큰 문이라 하여 서대문(西大門)이라는 명칭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새문', '신문(新門)'이라고도 불리우기도 했다.
돈의문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중구 정동의 '신문로'나 '새문안길,' '새문안교회' 등의 이름은 돈의문의 다른 이름인 '신문', '새문' 에서 따온 말인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돈의문은 1915년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경성도시개발계획에 따른 전차의 복선화로 인해 강제로 헐리게 되었고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앞 정동사거리에 ‘돈의문 터' 라는 표지석만이 남아 있다.
3.숭례문(崇禮門): 남대문
흔히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부른다. 보통 남대문이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이 붙인 명칭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이름은 숭례문이 만들 때 부터 불린 이름이다.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는데,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智: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숭례문의 "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국보 1호로 지정 된 남대문은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경에 방화범 채종기의 방화 화재로 인해 불타기 시작해 약 5시간 후인 11일 오전 1시 54분, 목조 건물 일부와 석축 기반을 남기고 2층 누각이 모두 붕괴되어 소실되었다
4. 숙정문(肅靖門) 또는 숙청문(肅淸門) : 북대문
(지'智'를 대신하여 정'靖'을 썼다)
서울 성곽의 4대문 중 북쪽에 있는 문으로, '북대문' 으로 부르기도 했다.
지금의 숙정문은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1396년(태조 5)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함께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불리었다. 도성 북문이지만, 서울성곽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에는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습니다.
이후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대문을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5.보신각(普信閣)
문은 아니지만 한양의 중심부에 세워진 것으로 보신각종을 걸어 놓기 위해 만든 것이다
조선시대 때 한양에 종을 처음 건 것은 1398년으로, 광주에서 주조한 종을 청운교 서쪽 종루에 걸었다가, 1413년(태종 13년)에 종루를 통운교(지금의 종로 네거리)로 옮기고 1458년(세조 4년)에는 새로운 종을 주조하여 달았으나 임진왜란으로 종루는 소실되고 종도 파괴 되었다
그 후 1619년(광해군 11년)에 종각을 다시 짓고 종을 걸었는데 이때 세운 종각은 임진왜란 전의 2층 종루가 아니고 1층 종각이었으며 여기에 건 종은 명례동(지금의 명동 인근) 고개에 있었던 것을 옮겨왔다고 합니다.
그후 조선 후기까지 4차례나 화재와 중건이 있다가 1895년에 종각에 '보신각'이란 편액이 걸린 이후 종도 보신각 종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6•25전쟁으로 또 한차례 종각이 파손된 것을 1953년 중건하였다가 1980년 다시 2층 종루로 복원하였고,원래의 종을 보존하기 위해 1985년에 새로운 종을 주조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 것이다.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된 보신각은 서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전통 목조 건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매년 양력 12월 31일 밤 12시를 기해 보신각종을 33번 치는 제야의 종 타종행사는 대한민국의 가장 대표적인 새해맞이 행사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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