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격전지 게티즈버그를 가다 남북전쟁 때 대격전지 링컨 연설한 곳으로 유명 전쟁 당시 유품 그대로 보관
미국 영혼의 산실, 게티즈버그(Gettysburg). 무려 4년 동안의 지루한 남북 전쟁에서 가장 치열하고 참혹했으며 마지막 종지부를 찍었던 곳이 바로 이곳 아니던가.
펜실베이니아 주 남부지역의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서 남군과 북군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가 1863년 7월 1일 이른 아침 남군의 선제 공격으로 대접전이 벌어졌다. 남군은 북군보다 등히 강했다.
그러나 막강한 군사력에다 선제공격까지 한 남군이 아이러니하게도 대패한다. 이 남북 전쟁이야말로 미국의 역사를 뒤바꾸어 놓은 전쟁이다.
북군이 승리했기에 링컨이 약속한 대로 국민을 위한 민주 국가도 새로 태어났으며 노예해방도 되고 이민도 받아주며 오늘의 오바마도 있지 않은가. 더욱이 올해는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이 발표된 지 꼭 100년이 되는 기념비적인 해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대로 나에게도 꿈이 있었다.
이곳 게티즈버그를 꼭 한번 가 보고 싶은 필자의 오랜 꿈이었다. 미국에 살면서 더욱이 매주 여행 칼럼을 쓴다는 주제에 미국 영혼의 고향인 게티즈버그를 찾고 싶은 열망은 묻지않아도 필자의 오랜 꿈이었다. 그 꿈이 이루어 지게 된 기폭제는 중앙일보 독자들이다.
독자들의 요구와 필자의 꿈이 맞아 떨어지면서 워싱턴 D. C.행 비행기에 오른 날짜가 9월 10일 새벽 아침이다.
다음날 아침 게티즈버그 밀리터리 공원(Gettysburg National Military Park) 방문객 안내소에 도착하니 투어 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다. '물건을 모르면 값이라도 많이 주라'는 말이 있어 1인당 36달러짜리 제일 비싸고 시간도 제일 긴 2시간 투어 버스를 예약하고 영화관 안으로 들어간다.
약 30분 동안 남북 전쟁에 대한 영화를 보고난 뒤 2층에 있는 사이클로라마(Cyclorama) 영상 룸으로 안내를 받아 올라간다.
옛날에 시네마스코프나 IMAX영상은 익히 봐 왔지만 사이클로라마는 이름 자체도 생소한 데다 360도 원형 화면 전체에서 벌어지는 파노라마식 입체 장면은 감탄을 넘어 입이 쩍 벌어진다. 사진인지 그림인지 뽀얀 포연에 가려 정확하게 식별조차 하기 어렵지만 여기 저기서 요란한 포탄이 터지면서 섬광들이 비출 때는 참으로 섬세하고 정밀하게 표현을 잘해 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수없는 말과 마차들이 넘어지고 부지기수로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참혹한 장면 앞에서는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게티즈버그에서 벌어진 남북 전쟁은 애초에 목화밭에서 발단하여 노예문제로 까지 비화한 종교전쟁이나 영토전쟁이 아닌 이해 타산에서 빚어진 패권 다툼이었다.
당시 남부에 있는 주들은 유럽으로 목화수출이 큰 수입원이었는데 정책적으로 수출에 제동을 걸 뿐 아니라 더욱이 목화밭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킨다니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 전쟁도 불사하게 되었다.
2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곳곳에서 치열했던 전흔을 찾아다니며 가이드의 자세한 설명을 듣게 된다.
흑인 한 명 없는 백인들 틈에 끼어 동양인이 미운 오리 새끼처럼 용감하게 동승하고 있자니 자연 백인들의 시선이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는 느낌이다.
1863년 7월 3일은 4년 동안 지속됐던 대치 상황이 결판나는 날이다. 북군과 남군은 게티즈버그 다운타운 북쪽에 서로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다가 군사력이 훨씬 더 막강했던 남군이 7월 1일 이른 아침 서쪽과 북쪽에서 선제 공격으로 진격해 내려온다.
북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힘에 밀려 할 수 없이 도심을 버리고 남으로 남으로 계속 후퇴를 하다가 다음날 다운타운 남쪽에 겨우 배수진을 치게 된다.
6·25전쟁 때 밤낮으로 진지가 수없이 뒤바뀐 철의 삼각지보다 수십 수백 곱절 더 많은 희생자가 생긴 처절한 전쟁터였다.
7월 3일 결전의 날이 밝았다. 북군의 자력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는 고립무원의 싸움이었다.
악재 속에서도 호재가 있듯이 노예로 있던 수많은 흑인들이 도망 나와 노예해방을 주창하는 북군으로 편입하는 바람에 7월 3일 전세는 극적으로 역전되고 말았다.
가이드 말로는 이 전쟁에서 피아가 무려 16만 명이 죽었단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총 사망자가 5만 4000명이니 얼마나 처참한 동족상쟁이었는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7월 1일부터 3일까지 3일 전쟁에서 죽은 수많은 말과 동물들을 모아놓고 태우는데 고약한 악취가 석 달 동안이나 근방을 진동했단다.
낮은 능선 하나를 지나면 1만 5천명 어느 구릉지 아래서는 8000명 작은 능선을 하나씩 넘을 때 마다 수 천명 수 만 명씩 죽었다니 못다 핀 그 수많은 젊은 영혼들이 아직도 구천을 헤매는 것 같아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린다.
전쟁터 구간이 가로로 100리 40km가 넘는데 수많은 목책과 석상 그리고 동상들이 무려 1400여 개 기념비와 대포들은 가는 곳 마다 지천이다.
포연도 제대로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링컨의 유명한 연설을 한 곳이 바로 여기에 있다.
7월 3일 북군이 승리한 후 다음날 7월 4일에는 미국이 독립선언을 하며 국민에,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이라는 링컨의 그 유명한 연설은 다른 나라 정치가에게도 크나 큰 귀감이 되리라 본다.
링컨이 연설을 한 현충원(Soldiers National Cemetery) 안에 들어가니 따뜻한 인품의 그의 동상이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그의 덕분에 이민까지 와서 편히 살게 되니 감사한 마음과 감회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버스 투어가 끝난 뒤 마지막으로 박물관에 들어가 당시의 유품들을 돌아 볼 수 있다.
성조기의 변천사를 이곳에서 보게 된다. 미국이 어떻게 태어났으며 어떠한 경로를 거쳐 오늘의 민주국가로 발전했는가를 이민와서 사는 우리들도 미국역사의 산실인 이곳 유적지도 한번 둘러 봄이 유익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가는 곳 마다 조기가 걸려 있다.
그러고 보니 미국도 크고 작은 내우외환의 상처가 참으로 많은 나라 구나. 오늘따라 조기는 걸렸지만 킹 목사의 말대로 필자는 또 하나 작은 소망의 꿈을 마침내 이룬 날이다.
게티즈버그를 찾아가는 길은 D.C.에서 270번 프리웨이 북쪽으로 약 40마일, 15번 하이웨이 북쪽으로 바꿔 약 45마일 정도가면 '게티즈버그 (Gettysburg National Military Park)' 안내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