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나부끼는 수풀의 평원을 본 적이 있는가? 바람은 그 자체로는 형체도 냄새도 없다. 사람들은 바람이 무언가에 제 몸을 부딪힐 때 그 존재를 명확하게 인식한다. 예컨대, 흔들리는 나뭇가지나 잎새는 바람이 제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흔한 '수법'이다.
대평원이라 불리는 미 중부 지방은 한때 수풀이 천지를 이루었다. 국경 너머 캐나다 중앙 지역에서부터 오늘날의 텍사스 북부에 이르는 지역은 과거 '수풀의 바다'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식민 개척자들의 농경 의지는 그 많던 수풀들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강철 쟁기에 밀려 웬만한 바다보다 더 넓은 수풀의 대평원은 사라졌다.
리고선 이제 남은 건 흔적 정도다. 천만다행으로 뒤늦게 이 귀한 식생의 존재를 알아차린 사람들이 보존에 나섰기 때문에 그나마 흔적이라도 건질 수 있었다. 캔자스, 미주리, 일리노이, 아이오와 등지에 이제는 커다란 호수 정도의 크기로 남아 있는 '키 큰 수풀'(tallgrass) 평원 보호지역이 그들이다.
키 큰 수풀은 말 그대로 크게 자라는 풀들이다. 보통 어른 어깨 높이에서 7피트 안팎까지 자라는 다양한 초본과의 식물들이다. 대평원의 서쪽은 과거 '키 작은 수풀'(shortgrass)들이 역시 바다를 이루고 있었지만, 이 역시 많이 사라졌다. 키 작은 수풀 또한 키가 작다고는 하지만, 어른 무릎 근처 높이까지는 자란다.
가을부터 봄까지 바람이 많이 부는 계절, 키 큰 수풀의 평원은 마치 바다처럼 풀의 물결이 일렁인다. 흔히 구경할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하는 것이다.
수풀의 바다에서 바람은 철학이 된다. 누군가는 그 바람을 맞고 서있으면서 번뇌를 훌훌 날리기도 하고, 혹자는 삶의 신산스러움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산다는 게 바람처럼, 제 몸뚱이가 바람인양 느껴지는 체험을 할 수도 있다.
수풀의 바다로 유명한 곳은 캔자스의 톨 그래스 프레리 국립보호지역, 미주리의 프레리 스테이트 파크, 노스 다코타의 샤이엔 국립 초원지역 등이다. 출장길이나 대륙을 자동차로 횡단할 계기가 있다면, 오고 가는 길에 한번쯤은 꼭 돌아볼 만 하다. 물론 수풀 보호지역을 목적지로 삼아 훌쩍 여행을 떠나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평생 두 번 구경하기 힘든 풍광들을 접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