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 없이 법치수호 대쪽판사…데이비드 수터 전 美대법관 별세
부시 지명에도 진보 판결…보수측 반발에도 흔들림 없이 소신 지켜 독신 생활하며 사교활동 자제…"로마 공화정, 권력 집중에 붕괴" 경고도
부시 지명에도 진보 판결…보수측 반발에도 흔들림 없이 소신 지켜
독신 생활하며 사교활동 자제…"로마 공화정, 권력 집중에 붕괴" 경고도
(서울=연합뉴스) 고동욱 기자 = 세간에서 규정한 진보와 보수 구분에 얽매이지 않고 법리에만 입각한 판결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미국의 데이비드 수터 전 연방대법관이 8일(현지시간) 뉴햄프셔주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AP 통신 등 외신이 보도했다. 향년 85세.
하버드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옥스퍼드대에서 로즈 장학생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수터 전 대법관은 뉴햄프셔주 법무장관, 같은 주 판사 등을 거쳐 1990년 조지 H.W. 부시(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에 의해 연방대법관으로 임명됐다.
공화당 진영에서는 '온건한 보수주의자'로 분류된 그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판결을 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수터 전 대법관은 여성의 낙태 권리를 인정하는 기존의 이른바 '로 대 웨이드' 판례를 유지하고, 공립 고등학교 졸업식에서의 종교 의례를 금지하는 판결에 참여함으로써 보수층의 기대와 다른 행보를 보였다.
이밖에도 그는 지적 장애를 가진 살인범에 대한 사형 집행 금지, 성인 간의 합의된 동성 성관계 처벌 금지 등 여러 차례 진보적 판결에 참여했다.
2000년 미국 대선을 둘러싼 '재개표 소송전'에서는 자신을 지명한 부시 전 대통령의 아들인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당선을 확정 지은 다수의견의 편에 서지 않기도 했다.
이런 수터 전 대법관의 판결에 실망한 보수 진영에서는 "더 이상의 수터는 안 된다"(No more Souters)라는 구호와 함께 대법원 구성을 더 보수 성향으로 쏠리도록 바꾸려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수터 전 대법관의 전기를 쓴 작가 틴슬리 야브로는 그가 "편향된 입장에 서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2008년 미국 최대 에너지 기업 엑손모빌이 알래스카 기름 유출 사고와 관련해 피해자들에게 지급할 징벌적 배상금을 대폭 감액하는 등 사안에 따라 진보와 보수 사이를 넘나들었다는 것이다.
연방대법관 재직 시절 그는 집무실에서 요구르트와 사과로 점심을 해결하는 등 소탈한 생활 태도를 유지했다고 AP는 전했다.
대법원의 업무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는 10월부터 이듬해 여름까지는 청사에서 가까운 곳에 방을 얻고 주 7일, 하루 12시간을 사무실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는 이 기간에 여가를 위해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며 '지적 뇌수술'을 받는 기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역대 연방대법관 중 6명뿐인 독신자였던 그가 임명됐을 때 언론에서는 "수도에서 가장 주목받는 총각"이라는 농담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업무 기간에는 집 근처 군 기지에서 조깅을 하는 것 외에는 사교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고, 여름에 휴정기가 찾아오면 고향인 뉴햄프셔로 돌아가 산을 타는 데 열중하는 등 수도승같은 생활을 했다.
퇴임 후 뉴햄프셔에 새 주택을 구매했을 때는 그가 보유한 책의 무게 때문에 집 바닥이 무너질까 걱정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생전 수터 전 대법관은 정부 권력에 대한 견제를 강조했다.
그는 2012년 인터뷰에서 "문제가 제기되지 않으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문제가 심각해졌을 때, 어떤 이가 등장해 '내게 권력을 몰아준다면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것이 로마 공화정이 붕괴한 방식"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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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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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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