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백스텝 몰라" 유시민 혀 내둘렀다…고문도 버틴 투사 김문수 [대선주자 탐구]

6·3 대선주자 탐구
드디어 출발 총성이 울렸습니다. 12일 공식선거운동 기간이 시작되면서 대선 후보들은 22일간의 열전에 돌입했습니다. 중앙일보는 기호 순서에 따라 주요 대선 후보들의 인생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전해드립니다. 1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에 이은 두번째 순서는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입니다.
“야, 이 빨갱이 XX야! 심상정 어딨어? 안 불어?”

1986년 5월, 경기 성남시 한 야산의 ‘송파 보안사’ 건물 안에 35세의 한 젊은이가 발가벗겨진 채 철제 의자에 꽁꽁 묶여 있었다. 수치심과 폭언, 욕설로 인한 자연발생적 공포에 떨던 그가 남은 기력을 모두 짜내 큰 소리로 답했다.

“모릅니다.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순간 그, 김문수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서노련) 지도위원의 빈약한 몸에 물리적 폭력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매질로도 그의 입을 여는 데 실패하자 그들은 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5·3 인천항쟁’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붙잡혀온 그는 ‘통닭구이’,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갖은 고문을 당했지만 끝내 ‘동지’의 소재를 밝히지 않았다.
옥고를 치른 뒤 출소한 직후의 김문수 후보가 민가협(민주화가족실천협의회) 행사에서 ‘양심수 전원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그가 민주투사이자 노동혁명가였던 시절이다. 사진 김문수 캠프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갖은 압박을 버티며 끝내 자리를 지켜낸 건 우연이 아니다. 옛 동지인 유시민 작가의 표현대로 ‘백스텝(뒷걸음질) 모르는 김문수’는 오랜 고난과 담금질의 소산이다.

젊은 시절 사회 혁신과 변혁을 꿈꾸던 ‘왼쪽의 혁명가’는 사상의 전변을 통해 보수 정당에 입당한 뒤 승승장구와 연전연패를 순차적으로 맛보았다. “정치 생명이 끝났다”고 모두가 외면하던 그때 김 후보는 보란 듯이 다시 일어서 나라를 양분하는 거대 정당의 대선 후보가 됐다.

판자촌 단칸방, 갱죽으로 연명...가난했던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뽑힌 김문수 후보가 지난 5월 3일 후보 수락연설을 하고 있다. 뉴스1
김 후보는 6·25 전쟁의 포성이 자욱했던 1951년 8월 27일 경북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 두메산골에서 김승헌씨와 조순조씨의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리 어렵지 않던 살림은 김 후보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4학년 때 부친이 빚보증을 잘못 섰다가 가산을 모두 날리면서 급격히 기울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켜야 했던 영천 판자촌의 단칸방에서 아홉 식구가 함께 살아야 했고, 곡물이 없어 매일 나물로 만든 갱죽으로 연명해야 했다.
경북중학교 입학식에서 아버지와 함께 기념 촬영한 김문수 후보. 사진 김문수 캠프
가족의 희망이던 김 후보는 공부를 잘해 지역 최고 명문 경북중·고에 진학했다. 그에게는 고3 때 3선 개헌 반대시위에 나섰다가 ‘무기정학’을 당할 정도의 ‘반골’ 기질도 있었다. 천만 다행히 구제받아 1970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진학한 그는 당시 유행하던 민족주의에 심취해 운동권 학생이 됐고 이듬해 10월 위수령 발동 직후 제적됐다.

서울대 1차 제적 후 노동자의 길로
김 후보는 김근태(전 열린우리당 의장) 선배의 지도 하에 여름방학 때 경험한 공장 ‘위장 취업’의 기억을 떠올리며 노동자가 되기로 했다. 동대문시장 봉제공장 등에서 ‘또또사’(똑딱단추를 달기 위해 옷에 구멍 내는 일을 하는 사람), 재단 보조 등으로 일하던 그는 뜻밖의 복교 조처로 복학했지만, 이내 민청학련 조직을 주도했다가 1973년 또다시 제적 및 수배 대상이 됐다.

위암 말기였던 모친이 도피 중 급거 귀향한 김 후보의 품에 안긴 뒤 별세한 것이 그해 연말이었다. 모친의 유언은 “문수야 안아줘”였다. 설상가상으로 부친 역시 그로부터 4년 뒤 발생한 화재로 별세해 그는 26세에 고아가 됐다.
노동운동을 하던 시절의 김문수 후보. 사진 김문수 캠프

김 후보는 1976년 한일공업 노조 위원장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노동운동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의 현장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구타와 가혹 행위, 고문에 시달린 끝에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천만 다행히도 그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가 구속피의자 대부분을 전향적으로 풀어준 덕택에 가까스로 기소를 면했다.

두 노조위원장의 결합...노동현장서 부인 만나다
부인 설난영 여사를 만난 것도 노동운동 과정에서였다. 한국노총 금속노조 남서울지부 청년부장 시절 남서울지부 여성부장이자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이던 설 여사를 알게 된 김 후보는 “설 분회장 시집갈 데 없으면 나한테 와요”라고 프러포즈했지만, 처음에는 거절당했다. 두 사람을 맺어준 건 시대였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갈 위기에 직면해 도피하던 김 후보가 설 여사와 여동생이 운영하던 빵집을 최후의 도피처로 삼았던 게 인연이 돼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됐다.
1981년 9월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와 설난영 여사가 봉천동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신랑 신부가 동시 입장했고, 설 여사는 웨딩 드레스 대신 일반 원피스를 입었다. 사진 김문수 캠프
김 후보는 당시 “딸을 어떻게 먹여 살리겠느냐”는 장인의 추궁에 “저는 만인(萬人)을 위해 사는 사람인데 여자 하나 못 먹여 살리겠습니까”라고 답해 장인을 놀라게 했다. 전남 순천 출신인 설 여사와는 영호남 커플로, 1녀를 두고 있다. 두 노조위원장의 결혼식을‘위장 집회’로 의심한 공안 당국이 ‘닭장차’ 5대를 보내 감시하는 일도 있었다.

김 후보는 이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부위원장,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서노련 지도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노동운동계의 거물급 지도자로 성장했다. 당시 그와 노동운동을 함께 했던 심상정 전 정의당 대표는 “동지로 지내던 시절의 김문수는 전설이었다. 운동권의 황태자이자 하늘 같은 선배였다”라고 그를 표현하기도 했다.

소련 붕괴로 혁명 포기...민중당 거쳐 보수 정당으로
그러다가 1986년 5·3 인천항쟁 주도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형을 선고받고 2년 6개월을 복역했다. 그의 출소 직후 소련이 붕괴했고, 김 후보는 혁명을 포기했다. 그는 지난 4월 9일 대선 출마 현장에서 “마흔 살이 돼서야 공산 국가들이 붕괴하는 것을 보고 혁명가의 길을 포기했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그가 택한 대안은 합법 진보 정당을 통한 원내 진입이었다. 하지만 그 통로를 위해 그가 만든 민중당은 1992년 총선 때 단 한 석도 얻지 못하고 참패했다. 설상가상으로 총 득표율이 2%에 못 미치는 바람에 정당법에 따라 해산해야 했다. 길을 잃고 방황하던 김 후보를, ‘젊은 피’ 수혈을 원했던 당시 여당이자 김 후보의 투쟁 상대 민주자유당이 스카우트했다.
1994년 민주자유당에 입당한 뒤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부천 소사 지구당 위원장 임명장을 받고 있는 김 후보. 중앙포토

‘변절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치른 1996년 총선에서 그는 절대 열세라는 예상을 뒤엎고 부천 소사 지역구에서 ‘DJ의 오른팔’ 박지원 의원을 꺾으며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3선 의원, 2선 경기 지사...탄탄대로였던 정치인의 길
이후 그의 정치 역정은 정확하게 반분된다. 앞의 절반은 탄탄대로였다. 3선 의원과 두 차례의 경기지사 당선이라는 영광이 그의 것이었다. 유명 정치인이 되기 시작한 발판은 2003년 ‘차떼기 정국’이었다. 불법 대선자금 수사의 와중에 붕괴 위기를 맞은 한나라당은 젊은 개혁파 의원이던 그에게 공천심사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겼다.

김문수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오른쪽)이 2004년 3월 총선 공천자 명단을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 후보는 그때 ‘꼿꼿문수’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공천심사위에 국회의원 대신 외부 인사를 대거 참여시켰고, 민원과 협박, 매수의 유혹을 철저히 차단했다. 그에게 그 자리를 맡긴 최병렬 당시 당대표까지 공천에서 탈락시킬 정도였다. 당시 공천심사위원으로 활동했던 홍준표 전 국민의힘 경선 후보는 “한국 정당 사상 가장 깨끗했던 공천이, 김문수 공천심사위원장이 주도한 한나라당의 17대 총선 공천이었다”고 그를 극찬한 바 있다.

경기지사로서의 활약도 적지 않다. 김 후보는 두 차례 경기지사를 역임하면서 이제 빛을 보기 시작한 GTX를 처음 기획하는 등 상당한 실적을 남겼다.
경기지사 시절의 김문수 후보가 GTX와 관련한 설명을 듣고 있다. 김 지사가 씨앗을 뿌린 GTX는 이제 순차적으로 완공되고 있다. 사진 김문수 캠프
연전연패로 잊힌 정치인...윤석열 정부에서 화려하게 부활
그러나 정치 역정의 나머지 절반은 실패와 고난의 연속이었다. 경기지사직을 유지한 채 도전했던 2012년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패한 것이 시작이었다. 결정타는 2015년 20대 총선이었다. 그는 느닷없이 정치적 발판이자 고향이던 경기 지역을 떠나 보수의 아성인 대구 수성갑에 출마하면서 “무혈입성하려는 거냐”는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민주당 김부겸 후보에게 패하면서 이중의 타격을 입었다. 그는 이때부터 태극기 집회에 참석하는 등 사상의 행보를 조금 더 오른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8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그는 사실상 정치 생명이 끝난 인물로 치부됐다.
국회보다 아스팔트에서 더 자주 모습을 보이던 2019년 9월 김 후보가 조국 법무부장관 퇴진과 문재인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며 삭발하고 있다. 뉴스1

주류에서 밀려난 듯하던 그가 다시 세인에게 이름을 알린 건 2022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였다. 그는 장관급 대통령자문위원장인 경제사회노동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복귀를 알린 데 이어 지난해 8월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임명돼 국무위원이 됐다.

김 후보가 다시 정치적 거물로 부활한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12·3 비상계엄이었다. 그는 계엄 직후 “국무위원 전원이 사죄해야 한다”는 서영교 민주당 의원의 요구에 대부분의 국무위원이 고개를 숙일 때 홀로 자리에 앉아 미동도 않는 모습을 보이면서 일약 보수 진영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12월 11일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이 국회 긴급현안질문에서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국무위원 전원 사과 요구를 거부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연합뉴스
“가장 낮은 곳서 가장 뜨겁게”...그는 대통령 될 수 있을까
이후 승승장구하면서 보수 진영 잠룡 중 지지율 1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더니 대선 후보를 뽑는 국민의힘 경선에서도 기라성 같은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마지막까지 홀로 섰다. 오히려 경선이 끝난 뒤 한덕수 전 대통령 권한대행에 자리를 빼앗길 뻔한 최대 위기가 도래했으나 왕년의 투쟁 실력을 발휘해 자리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고양=뉴스1) 김민지 기자 = 김문수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가 3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5차 전당대회에서 최종 후보로 확정된 뒤 수락연설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 2025.5.3/뉴스1
지난 3일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언제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뜨겁게 살아왔다”고 스스로를 정의한 김 후보는 과연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을까.

※김문수 후보를 비롯한 주요 대선 후보들의 더 자세한 인생 이야기는 더중앙플러스의 ‘6·3 대선주자 탐구’ 시리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중앙플러스 - 6.3 대선주자 탐구
“이 빨갱이! 심상정 불어!” 통닭구이 고문 버틴 김문수[김문수 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27064

수배고 뭐고 고향 달려갔다…“문수야 안아줘” 엄마의 마지막 [김문수 ②]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27383

그 여자, 김문수랑 결혼한다고? 경찰은 ‘닭장차 5대’ 보냈다 [김문수 ③]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27685

욕먹고 여당 간 혁명가 김문수…첫 상대, 무려 박지원이었다 [김문수 ④]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32312

김문수에 “밥 한끼 사주고 싶소”…98년 성탄전야, 한 노인의 접대 [김문수 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33432

43세 김문수, 서울대 졸업…모친의 ‘마지막 유언’ 지켰다 [김문수 ⑥]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33886

“니들은 되고 김문수는 안되냐” 30년 동지 홍준표 ‘마지막 의리’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34147

이재명, 수면제 수십알 삼켰다…아버지 죽도록 미웠던 17살 [이재명 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28176

고졸 따낸 이재명 “최고의 날”…아버지는 “다시 공장 다녀라” [이재명 ②]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28443

이재명 “저 사시 붙었어요”…부친의 눈물, 그게 임종이었다 [이재명 ③]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28744

이재명 생가마을서 만난 노인 “재맹이? 아버지 닮아 머리 좋아” [이재명 ④]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31680

대낮 납치된 성남노조 간부…“이변”이라 불린 청년의 등장 [이재명 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31995

이재명도 아버지도 움찔했다…“내를 때리소!” 모친의 반란 [이재명 ⑥]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33871

허벅지 피멍 가득한 여고생…분노한 이준석, 그때 朴이 왔다 [이준석 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34999

“우리가 거지냐, 왜 구걸해”…이준석 바꾼 ‘삼성전자 사건’ [이준석 ②]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35263



박진석([email protected])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