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대학교(총장 최재원)·카이스트(KAIST)·서울대학교 공동연구팀이 상온에서 마이크로 스케일(머리카락보다 얇은 구조)의 미세 선폭 회로 인쇄가 가능하고 온도에 따라 딱딱함과 부드러움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액체금속 전자잉크를 개발했다고 4일 밝혔다.
연구팀이 개발한 전자잉크는 정밀한 인쇄가 가능한 물성과 우수한 전기전도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으며, 딱딱함과 부드러움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전자소자를 상온에서 정밀 제작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이다.
이 전자잉크 기술은 상용 인쇄회로 기판(PCB) 수준의 복잡한 고해상도 다층 회로 인쇄가 가능하며 완성된 전자기기는 온도에 반응해 딱딱한 형태를 유연하게 변화시킬 수 있어, 차세대 웨어러블 기기, 임플란터블 기기, 소프트 로보틱스 등 다양한 분야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원하는 형태로 자유자재로 바뀌는 전자소자를 개발한 이번 연구 성과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Science Advances)』 5월 30일자에 게재됐다. 카이스트 전기 및 전자공학부 이시목 박사과정생과 부산대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이건희 교수가 공동 제1저자, 카이스트 전기전자공학과 정재웅 교수·신소재공학과 스티브박 교수 연구팀과 서울대 첨단융합공학과 박성준 교수팀이 공동으로 수행했다.
기존 전자기기는 용도에 따라 딱딱한 형태와 유연한 형태로 나뉘어 개발돼 왔다.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같은 딱딱한 전자기기는 안정적인 성능을 제공하지만 몸에 착용할 때 불편함을 주고, 얇고 유연한 웨어러블 기기는 착용감은 좋지만 부드러운 특성 때문에 정밀한 조작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고정된 형태의 한계 때문에 상황에 따라 딱딱함과 부드러움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가변강성(可變剛性, 강도가 변할 수 있는)’ 전자기기에 대한 필요성이 커져 왔다.
연구팀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체온 근처(29.8 ℃)에서 녹는 액체금속 갈륨에 주목했다. ‘갈륨’은 고체 상태에서는 매우 단단하지만 녹으면 부드러운 액체가 되어 큰 폭의 강성 변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기존 갈륨은 물방울처럼 뭉치려는 성질(높은 표면장력)과 액체 상태에서의 불안정성 때문에 정밀한 회로 제작이 어려웠고, 제조 과정에서 원치 않는 상변화가 일어나는 문제가 있었다.
연구팀은 이러한 갈륨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산성도(pH) 제어 기반 액체금속 전자잉크 프린팅 기술을 개발했다.
먼저, 마이크로 크기의 갈륨 입자를 디메틸 설폭사이드(Dimethyl Sulfoxide, DMSO)라는 중성 용매에 친수성 폴리우레탄 고분자와 함께 섞어 전자잉크를 제작했다. 이때 DMSO 용매의 중성 상태 덕분에 갈륨 입자들이 고분자 매트릭스에 골고루 분산된 안정적인 고점성 잉크가 형성되며, 이를 통해 상온에서 고해상도 회로 인쇄가 가능해진다.
인쇄 후에는 가열 과정에서 DMSO 용매가 분해되면서 산성 물질을 생성하고, 이 산성 환경에서 갈륨 입자들 표면의 산화막이 제거돼 입자들이 물리적으로 연결되면서 전기가 통하고 강성을 조절할 수 있는 회로가 형성된다.
이러한 2단계 공정을 통해 상온에서는 안정적인 인쇄가 가능하면서도 완성 후에는 우수한 전기전도성과 가변강성 특성을 갖는 전자소자를 구현할 수 있었다.
개발된 전자잉크는 머리카락 굵기의 절반(약 50 μm)인 미세 선폭으로 정밀한 회로를 인쇄할 수 있으며, 우수한 전기전도도(2.27 × 10⁶ S/m)와 함께 1,465배나 되는 강성 조절 비율을 제공한다. 이는 플라스틱처럼 딱딱한 상태에서 고무처럼 말랑한 상태까지 자유자재로 변할 수 있음을 뜻한다. 또한 스크린 프린팅, 딥 코팅 등 기존 인쇄 방법들과 호환돼 고해상 대면적 회로 제작은 물론 복잡한 3차원 형태의 다양한 전자기기 제작을 가능하게 한다.
연구팀은 이 기술을 활용해 평상시에는 딱딱한 휴대용 전자기기로 사용하다가 몸에 착용하면 부드러운 웨어러블 헬스케어 기기로 변환되는 가변형 다목적 기기를 개발했다. 뿐만 아니라, 수술 시에는 딱딱한 상태로 정밀한 조작과 뇌 삽입이 가능하지만 뇌 조직 내에서는 부드럽게 변해 조직 내 염증반응을 최소화하는 뇌 탐침을 구현함으로써 이식용 소자로서의 활용 가능성도 입증했다.
이건희 부산대 교수는 “갈륨이라는 낮은 녹는점 금속을 이용한 강성변형 전극이라는 신소재를 제시한 의미 있는 결과”라며 “하나의 전자소자가 필요에 맞게 원하는 형태로 자유자재로 변형돼 사용된다면 헬스케어 전자소자, 임플란터블 전자소자 및 유연 로봇에 핵심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