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에 개봉하여 은근한 인기를 이어 가고 있는 영화 ‘콘클라베’는 새 교황의 선출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선거 관리 업무를 맡은 주인공, 로렌스 추기경단 단장이 의도치 않게 교황 후보 다크호스로 떠올라 인기가 점점 많아지는 상황이다. 로렌스는 스스로의 신앙심에 대한 의심 때문에 단장직도 거부했다가 떠밀려서 맡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선거 첫날 강론에서 짧은 연설을 덧붙인다. 다양성과 관용을 강조하며 그는 강변한다.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죄는 확신입니다 (…) 의심하는 교황을 허락하시도록 하느님께 기도합시다.”
이 심상치 않은 연설이 몇몇 추기경들의 마음을 흔든다. 유력 후보들을 제치고 자신의 인기가 올라가자 주인공은 당황한다. 본인이 질색하는 모습에 오히려 지지자들이 늘어난다.
예술은 무엇이고 작가는 누구인가
의심이 창작 태도이자 삶의 방향
‘덜 그리고 못 그릴 것’이 작업 원칙
미술 교육 개선 힘쓰다 47세로 요절
제목이‘당신의 밝은 미래’인 설치
과연 밝은 미래 맞는지 의심 자아내
영화의 주인공을 더 없이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의심하는 태도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의심을 멈추지 않는다. 전임 교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의심하고, 콘클라베 진행 중에 맞닥뜨리는 사건들의 이면과 배후를 의심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과 역할, 신앙에 대한 확신도 의심한다. 주인공의 세례명이 의심하는 자의 상징, 토마스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의 의심은 복잡한 선거판을 현명하게 이끄는 데 필요한 통찰력과 겸손의 미덕을 동시에 안겨준다.
나와 세계에 대한 의심을 창작의 기본 태도이자 삶의 방향으로 삼은 예술가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박이소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모든 것에 대한 나의 끝없는 의심을 정당화하는 과정”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대체로 예술가는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법이지만 박이소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는 당연해 보이는 것들을 의심하는 날카로움을 작품의 소재로 쓰는 데 그치지 않았다. 미술계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는 놀라울 정도로 적극적이었고, 자기 자신에게는 더없이 엄격했다. 작품에는 지성과 유머가, 행위에는 희생과 헌신이 묻어났다.
박이소는 1957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몸이 허약해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결석이 잦았고, 특히 체육 시간과 군사 훈련을 견디지 못해 자퇴했다. 1981년에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그 이듬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익명으로 자신을 낮춘 ‘박모’가 첫 예명
1984년,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칠 무렵 그는 박철호라는 본명 대신 ‘박모’라는 예명을 사용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려야 하는 출발점에서 나는 아무도 아니라고 선언을 하는 듯한 작명이었다. 항상 스스로를 낮추고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을 소진한 그의 삶에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해 가을에 그는 ‘추수감사절 이후 박모의 단식’이라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먼저 교회 자선 프로그램에 신청하여 미국인 가정의 추수감사절 식사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단식을 시작하여 사흘 때 되는 날 정오에 밥솥을 줄에 매달아 목에 걸고 브루클린 다리를 건넜다.
이 무렵 그는 생각이 많았다. 그가 당시에 쓴 논문에는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깊은 고민이 드러난다. “작가라는 직업은 종종 무용하거나 창피해 보인다. 현재에 어떤 생산적인 일도 못 하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의 임무가 미래를 근심하고 대비하는 것이라 믿는다.”
작업 노트에는 예술가를 업으로 삼아 이국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일에 대한 걱정과 자기 성찰을 빼곡히 적었다. “부자 나라에 와서 가난한 나라의 돈을 펑펑 쓰며 공부한답시고 허황된 조형언어를 희롱하고 있는 나를 누가 용서해 줄 것인가.” 단식 퍼포먼스에 담긴 의미를 일부나마 짐작게 하는 문장이다.
그 이듬해 박이소는 브루클린에 작은 규모의 대안공간을 설립했다. 미술관이나 화랑에서 취급하지 않는 비주류 작가들을 소개하는 공간으로 당시 미국에서도 혁신적인 시도였다. 운영자금은 아르바이트로 번 돈과 기금 신청으로 마련했다. 그는 이곳에서 인종적, 문화적, 사회적 소수자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4년 가까이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틈틈이 자신의 작품도 만들었지만, 본인이 관장이라는 이유로 이 공간의 어떤 전시에도 출품하지 않았다.
박이소는 12년간 미국에서 공간 운영과 전시 기획, 기고와 번역 등의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1994년에 영구 귀국한다. 1995년에 신설된 삼성디자인교육원(SADI)의 전임교수직을 맡은 것이다. 귀국 후 그는 이방인이라는 의미를 담은 ‘이소’로 이름을 바꾼다. 그리고 2004년에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10년 동안 작가이자 교육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다.
박이소는 평소에도 한국의 미술 제도와 교육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 활동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신설학교의 커리큘럼을 짜고 기틀을 잡는 데 헌신했다. 교수라는 호칭을 쓰지 말자는 건의는 동료들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고 한다.
철저하게 자신을 소모해 강의 준비
그는 여러 학교에 출강했는데 학생들에게는 가장 존경받는 스승, 닮고 싶은 선배였다고 한다. 박이소처럼 철저하게 준비하고 자기를 진정으로 소모하는 선생을 보지 못했다는 동료 교수들의 증언도 전해진다.
한편으로는 작품활동도 꾸준히 해나갔다. 2002년에는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을 수상하고, 2003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을 대표하는 세 명의 작가 중 하나였다. 그리고 2004년, 박이소는 부산 비엔날레 참여를 앞두고 서울의 작업실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만 47세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박이소는 귀국 후 10년 남짓 활동했고 교육에 많은 시간을 쏟았기 때문에 작품을 많이 남긴 편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보통 개념미술로 분류되는데 언어와 아이디어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 완벽해 보이는 것은 오히려 기피했다. “1. 단순할 것. 2. 덜 그리고 못 그릴 것.” 그가 남긴 스물한 권의 작업 노트 중 첫 권에 적혀 있는 작업 원칙이다. 관심 있는 주제는 “세상의 모든 어설픈 것과 쓰잘 데 없는 것, 약한 것에 대한 존경” 같은 것들이었다.
그는 일상적이고 가공되지 않은 값싼 재료로 허술하게 대강 만드는 방식을 지향했다. 2002년작인 ‘당신의 밝은 미래’가 그 대표적 예. 이 작품에 대해 그는 “임시적 구조와 재료에서 인간 삶의 임시성과 너절함 같은 것을 본다…그것이 나의 부실한 모습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당신의 밝은 미래’는 각목으로 얼기설기 만든 구조물 위에 설치된 10개의 밝은 조명이 환한 빛을 내뿜고 있는 설치 작품이다. 그런데 이 조명들이 향하는 것은 그저 비어 있는 흰 벽. 과연 밝은 미래가 맞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행복을 광고할 때 우린 과연 행복한가 2004년작 ‘우리는 행복해요’ 역시 말과 이미지 사이에 미묘한 괴리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박이소가 부산 비엔날레 출품을 준비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은 유작이다. 그의 사후에 몇 차례 재현되었지만, 실제로 남아 있는 것은 작가가 그린 드로잉과 설치안 뿐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북한에 대한 방송에서 커다란 건물 위에 걸린 대형 선전 간판을 보고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단순한 문장이지만 현실의 맥락 속에서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역설을 담고 있다. 남에게 이토록 크게 행복을 광고해야 하는 상황은 무엇인가, 라는 의심은 우리는 과연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라는 근원적 물음으로 이어진다.
박이소는 이렇듯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의혹을 던지는 작품들을 만들었다. 현실을 살짝 삐딱하게 보게 만드는 자신의 작품처럼, 그는 비판하고 의심하는 자였다. 글에는 걱정과 자조가 가득했다. 반면 그가 교육과 제도 개선에 쏟은 열정은 미래에 대한 긍정과 확신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박이소는 끊임없는 의심을 통해 종종 어떤 확신에 이르렀고 그것이 그의 작품과 삶을 더없이 독특하고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영화 ‘콘클라베’의 주인공은 말한다. “우리의 믿음은 의심과 함께 손을 잡고 걷기 때문에 살아 숨쉬는 존재인 것입니다.” 의심과 확신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귀중한 자질인 것 같다. 종교에서도, 예술에서도,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