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지의 서울’ 속 미지(박보영)는 할머니가 들려준 이 말을 주문처럼 되뇌며 하루를 버틴다. 과거는 후회스럽고, 내일은 캄캄해 보일 때 사람은 오늘만이라도 붙잡아야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 오늘조차 만만치 않다. 좋은 말들을 붙들고 버텨보지만, 현실은 동화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전교 1등, 공기업 합격이라는 스펙을 가진 쌍둥이 언니 미래(박보영)의 삶도 예외는 아니다. 조직 내 부조리를 지적한 그의 정의로운 발언은 곧 회사 내 왕따로 이어지고, 그는 벽을 보고 앉아서 하루를 견뎌야 한다. 그럴 때면 누구나 인생에서 완벽히 도망가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이 드라마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 대부분이 ‘죽도록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 살아보기로 한 사람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대신할게. 난 너로 살고, 넌 나로 살아.”
내 편 드는 한 사람만 있어도
삶에서 도망치지 않을 수 있어
살려는 용기가 우리의 무기
생을 포기하려는 언니를 위해 쌍둥이 동생 미지는 인생을 바꿔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설정은 비현실적이지만 누구나 한 번쯤 품었을 법한 상상이다.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아주었으면. 발랄한 동생과 책임감에 눌린 언니가 서로의 자리를 바꾸면서 ‘왕자와 거지’나 영화 ‘광해’처럼 서로 다른 삶이 가져오는 의외의 통찰과 지혜로 문제가 해결된다는 판타지를 떠올리게도 한다. 하지만 ‘미지의 서울’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캔디’ 같은 씩씩함으로도, 우등생의 정직한 노력으로도,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고 아픔은 쉽게 희석되지 않는다. 드라마는 조용히 말한다. 누구의 삶도,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다고. 진정한 공감은 결국 내 입장에서 이해하고 위로하는 게 아니라 ‘살아본’ 끝에 찾아오는 감정임을. “남이 되어서야 알았다. 나의 가장 큰 천적은 나라는 것.”
드라마는 타인을 이해하기 전에, 스스로를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야기한다. 회사 동료들의 따돌림, 소문과 오해, 재개발을 설득하기 위해 만난 식당 사장 로사(원미경)의 단단히 닫힌 마음, 첫사랑 호수(박진영)와 미지 사이에 감춰졌던 오랜 오해. 모두가 주인공이 열어야 할 닫힌 마음의 문이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청춘들이 자기 자신에게조차 문을 닫아버린다는 것이다.
달리기 선수의 꿈이 부상으로 무너진 뒤 미지는 몇 년을 방 안에 숨은 채 지냈다. “반짝임이 다 사라지고, 다 타버린 폭죽처럼 쓸모도 볼품도 없는 나”를 스스로 미워한 채로. 호수 역시 아버지의 교통사고에 대한 죄책감과 부상으로 생긴 장애 앞에서 자신을 내리깎는다. 드라마 바깥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소셜미디어에선 모두가 괜찮은 척을 하고 자신만 뒤처진 것 같은 불안과 수치심이 내면을 잠식한다. 드라마는 말한다. 가장 먼저 열어야 할 문은, 타인의 마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나와 화해하고 혐오의 늪에서 나를 건져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미지는 살려고 숨은 거야. 숨으면 겁쟁이야? 암만 모양 빠져도 살려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거야.” 방 안에 웅크리고 있는 손녀에게 할머니가 건네는 말이다. “아이고, 우리 번데기. 얼마나 큰 나비가 되려고 이러나.” 나를 지지하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그런 할머니조차 고백한다. “쓰러지고 나니 이제야 알았어. 늙은 나도 무서운데, 너는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까.” 어른은 모든 것을 아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오면서 겪은 실패들 덕분에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약속한다. “나도 어떻게든 살아볼 테니, 너도 하루씩만 버텨줘.” 젊든 늙었든 공평하게 주어지는 하루하루. 도망가지 않고 버텨내는 삶. 어른이 청춘에게 줄 수 있는 건 조언보다 지지, 가르침보다 기다림이다. 청춘과 노년의 공존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가능하다.
“(고민을) 붙잡고 있으면 다른 걸 못 잡아요. 조금이라도 좋은 거, 기쁜 거, 즐거운 걸 붙잡아요.” 미지와 호수, 미래와 세진(류경수)은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연다. 그들이 삶에서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 곁에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죽음 이후에도 아들을 버리지 않은 호수의 계모, 조직 내 왕따 분위기 속에서도 묵묵히 미지를 도와준 직장 동료, 때로는 고민을 내려놓고 밤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라며 조용히 권해주는 세진의 따뜻한 말 한마디. 삶은 여전히 누구에게나 만만치 않다.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건, 그 고단한 삶에 대한 엄청난 극복이나 화려한 성공이 아니다. 대신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의 용기, 누군가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지는 연습이다. 그게 결국 도망치지 않고 버텨야 하는 삶에 우리가 꺼내쓸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의 무기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