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중앙일보

광고닫기

[주정완의 시선] 부동산 정책, 서울·지방 투트랙으로 가야

중앙일보

2025.06.19 08:18 2025.06.19 19:26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기사 공유
주정완 논설위원
“이렇게까지 많이 풀었습니까.” 벌써 22년 전인 2003년 초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이 했던 말이다. 당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부동산 관련 보고를 받는 자리였다. 전임 김대중 정부가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부동산 규제를 지나치게 많이 풀었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이후 노무현 정부는 5년 임기 내내 ‘집값과의 전쟁’을 벌였다. 정부의 무기는 부동산 규제였다. 당시로선 정부가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규제를 총동원했다. 비싼 집을 가진 사람에겐 종합부동산세 등으로 ‘세금 폭탄’을 때렸고, 신규 아파트 공급 가격을 억누르기 위해 분양가 상한제를 시행했다. 재건축 사업 과정에서 조합원들이 너무 많은 시세 차익을 가져간다고 보고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도 도입했다.

강남 폭등, 지방 부진 양극화 뚜렷
취임 초 이재명 정부 시험대 올라
‘문재인 때와 다르다’ 신호 보내야

그 결과는 익히 알고 있는 대로다. 노무현 정부는 집값과의 전쟁에서 철저히 패배했다. 시장의 수요와 공급을 무시한 정부 규제는 각종 부작용을 낳았다. 그렇게 집값도 못 잡고 인심만 잃었다. 결국 2007년 대선에서 보수정당(한나라당)에 정권을 넘겨줬다.

2017년 출범한 문재인 정부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당국자들은 과거의 쓰라린 경험에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노무현 정부 때보다 더 센 규제를 하면 집값을 잡을 수 있을 것이란 오만에 사로잡혔다. 한쪽에선 초저금리와 재정 적자로 막대한 돈을 풀어놓고 다른 쪽에선 집값을 꼭 잡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여기에 임대차 2법 등 과도한 규제의 부작용까지 겹치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가운데)이 2020년 6월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주택시장 과열요인 관리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손병두 전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김 전 장관, 김용범 전 기획재정부 1차관. 문재인 정부의 21번째 부동산 대책인 해당 관리방안에는 수도권과 대전, 청주 대부분 지역을 규제 지역으로 지정하고 주택담보대출(주담대)을 이용한 갭투자를 전면 차단해 집값 과열을 막겠다는 계획이 담겼다. 뉴스1

이재명 정부도 취임 초부터 심상치 않은 집값 급등세로 시험대에 올랐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이달 셋째 주 기준으로 서울 아파트값은 20주 연속 상승세를 이어갔다. 서울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구)와 용산구에서 불이 붙은 집값 상승세가 마포·성동·강동·동작구 등으로 퍼져나가는 분위기다. 반면에 울산을 제외한 부산·대구·광주·대전 등 지방 광역시 아파트값은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서울 핵심 지역은 뜨겁고 지방 대도시는 차가운 지역별 양극화가 뚜렷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규제의 칼날을 만지작거리는 건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그런데 뚜렷한 방향성이 보이지 않아 시장에선 설왕설래만 난무한 실정이다. 지난 대선 때 이재명 후보 캠프에선 “세금으로 집값을 잡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긴 했다. 이걸 부동산 세금 인상이 없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면 안 된다. 대선후보 시절 이 대통령이 “다주택자는 막을 수 없다. 세금을 열심히 내게 하면 된다”고 말한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처럼 ‘징벌적 세금’까진 아니라도 어느 정도의 세금 인상 카드를 쓸 가능성은 다분해 보인다.

아직 새 정부의 경제부총리나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가 지명되지 않은 점도 혼란을 부채질한다. 지난 12일 이형일 기획재정부 1차관이 주재한 부동산 시장 점검 회의에선 “가용한 정책 수단을 총망라해서 검토하겠다”는 입장이 나오긴 했다. 필요하다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식의 원론적인 언급이다. 이것만으론 이재명 정부의 부동산 대책 1호가 언제쯤 나올지, 어떤 내용을 담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서울 아파트값이 꾸준히 오르면서 6월 셋째 주 매매가격 상승률이 주간 기준으로는 6년 9개월 만에 최대 상승폭을 기록했다.한국부동산원의 전국 주간 아파트가격 동향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서울은 20주 연속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으며, 6월16일 0.36%로 상승폭이 점차 커지고 있다. 사진은 19일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아파트의 모습. 뉴시스

정부로선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다급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무차별적인 규제는 답이 아니다. 시장을 무시한 규제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처럼 다주택자를 집값 상승의 원흉으로 몰아가면서 ‘똘똘한 한 채’를 더욱 부추긴다면 규제의 부작용만 심해질 뿐이다.

정부가 어쩔 수 없이 부동산 규제를 하더라도 서울과 지방을 투트랙으로 접근하는 게 바람직하다. 최근 한국은행 보고서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나왔다. 한은은 수도권과 달리 지방에선 주택공급 과잉과 미분양 물량 누적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4월 기준으로 ‘악성 미분양’(준공 후 미분양) 물량은 12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는데 그중 83%가 지방 소재 물량이었다. 한은은 보고서에서 “비수도권에 활력을 불어넣음으로써 과도한 지역 간 불균형을 완화하고 수도권 인구집중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적었다.

무슨 일이든 시작이 중요하다. 시작부터 믿음을 얻지 못하면 그다음에는 더욱 어려워진다. 머지않아 등장할 이재명 정부의 부동산 대책 1호는 규제 일변도로 흘러선 안 된다. 수도권 공급확대 대책과 함께 서울과 지방의 양극화를 조금이라도 완화할 수 있게 차별화된 대응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이재명 정부는 문재인 정부 때와는 확실히 다를 것이란 신호를 시장에 보내주길 바란다.





주정완([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