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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첫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는 왜 김옥균을 쐈나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중앙일보

2025.06.19 08:22 2025.06.19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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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1894년 3월 28일, 중국 상하이의 동화양행 호텔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총을 맞아 그 자리에서 절명한 사람은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10년을 일본에서 떠돌다 청나라 정치 거물 이홍장을 만나러 온 김옥균이었다. 총을 쏜 사람은 그를 수행한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였다. 그는 처음부터 김옥균을 암살할 목적으로 그에게 접근해 몇 달 동안 친밀하게 지내온 터였다.

출세가 목적이라는 설 있지만
근대화 노선 달랐다는 분석도
김옥균은 청 도움 요청 시도도
복합적 인물들 단순 재단 안 돼

우타가와 고쿠니마사(1874~1944)의 우키요에 목판화 ‘김옥균씨 조난사건’(1894). [사진 도쿄경제대도서관]
김옥균은 망명 후 일본 정부에 계륵 취급을 받았으나 일본인 팬이 많은 스타이기도 했다(중앙SUNDAY 6월 14일 17면 ‘도망친 일본서도 조선 개화 미련’). 그래서 이 암살은 일본에서 파장을 일으켰고 암살 장면을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한 우키요에(에도 시대 대중용 그림, 주로 목판화)가 나올 정도였다. 실제로 암살 시간은 오후 3시경이었고 김옥균은 옛 중국 역사서 『자치통감』을 읽고 있었다고 하니 그림의 묘사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김옥균은 양복을 입고 홍종우는 한복을 입은 것은 맞았을 것이다. 홍종우는 파리 유학 시절에도 한복을 고수한 인물이었다.

김옥균 개혁 꿈 총탄에 좌절
김옥균
갑신정변 실패 후에도 멈추지 않았던 김옥균의 조선 개혁의 꿈은 이 총성으로 흩어졌다. 국민대 일본학과 박선영 교수에 따르면 그는 망명 후 일본에 실망하고 조선 독립을 위해 현실적으로 청나라와도 협상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이홍장과의 담판을 통해 조선을 중립국으로 한 아시아 평화 공존 방안을 추진할 생각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를 제거하고 싶어하는 일본인들도 있었다. 관련해서 박 교수는 논문에서 김옥균과 교류했던 일본인 낭인 와타나베 하지메의 말을 각주에 인용했다. 와타나베는 김옥균이 “조선을 중립국으로 하여 동양의 공원(公園)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며 “그러므로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훗날 일본인의 손에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김옥균이 ‘친일파’라는 일각의 주장에 대치되는 내용이다.

이것만 보아도 김옥균이 얼마나 복합적이고 흥미로운 인물인지 알 수 있다. 기자는 최근 영국 케임브리지대 도서관의 한국학 부서장 오지연 사서로부터 김옥균이 영국의 대아시아 외교 거물 해리 파크스에게 보낸 친필 서한을 발견했다는 제보를 받고 단독 기사(중앙SUNDAY 6월 14일 1면, 16~17면 ‘갑신정변 주역 김옥균 한글 편지 영국서 발견’)를 쓰면서 그것을 새삼 실감했다.

김옥균이 갑신정변 8개월 전에 보낸 이 편지는 ‘메이지유신의 숨은 조력자’로 불리는 파크스가 조선 공사로 막 임명된 것을 “경사”라며 반기고 “일본의 개혁에서 당신의 공이 십 분의 팔 분”이라 치하하며 “조선 일은 당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선은 십 분의 십 분을 다 생각지 아니하시면 어렵소”라는 말로 정변을 암시하며 조선 개혁의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이 서한에 대해 자문하고 기자와 인터뷰한 김종학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는 “한글로 편지를 쓴 것은 강렬한 독립 의식 표출과 보안을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영국을 비롯한 타국 외교관들이 대부분 과격하고 무리한 계획이라는 이유로 갑신정변을 반대하는 가운데 김옥균은 일본의 재야 세력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며 그들 또한 “오히려 김옥균이 설득한 것”으로서 “그가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기사를 쓰며 김옥균에 대한 관심은 그의 암살범 홍종우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왜 프랑스에 유학까지 간 사람이 김옥균과 한편이 되기는커녕 그를 암살하였을까? 과거의 일반적인 견해는 홍종우가 출세욕 가득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유학(1890년 말~1893년)은 조정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목적이었으며 김옥균 암살도 그를 원수로 여기는 고종과 민씨 척족에게 공을 세워 출세를 하려는 목표였다는 것. 실제로 그는 암살의 대가로 귀국하자마자 과거 응시 자격을 얻은 후 그의 과거 성적으로는 얻기 힘든 정5품 관직을 받았다.

그러나 홍종우를 자주적 근대화를 고민한 지식인으로 재조명하는 이들도 있다. 대표적인 사람은 조재곤 서강대 학술연구교수로 그는 홍종우가 파리에서도 한복을 고집하고 고종과 대원군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는 점, 지일파(知日派) 프랑스 사업가 에밀 기메가 세운 아시아 박물관(지금의 국립기메동양박물관)에서 일하면서 프랑스 학자들과 ‘춘향전’ ‘심청전’을 불어로 공동 번역한 점 등을 언급한다. 한마디로 홍종우는 근대의 중심 파리에서도 “민족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잃지 않았으며, 근대화 방법론에 있어서 김옥균과 달리 ‘군주 중심의 자주적 근대화’를 신봉했고 “외세에 의한 근대화를 결코 바라지 않았으므로” 김옥균을 암살했다는 것이다. (조재곤,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2005)

“홍종우는 장기 외유한 유생”
홍종우
반면에 박선영 교수는 “정작 홍종우는 황국협회를 조직해 조선의 전근대적 전제정치를 혁파하고자 한 독립협회를 폭력적으로 탄압했다”고 반박한다. 또한 홍종우의 ‘군주 중심의 자주적 근대화’는 메이지유신의 ‘존왕양이’ 즉 ‘천황을 중심으로 근대화를 이뤄 외세를 물리친다’ 구호를 이어받은 것으로서, 그는 실제로 프랑스로 가기 전에 일본에서 ‘메이지 지사들’과 관계를 맺었고 그들의 주선으로 프랑스에 가서 기메 등의 지일파 프랑스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고 본다. 홍종우는 프랑스의 공화주의나 자유주의는 탐구하지 않았으며 사실 ‘프랑스 유학생’이라기보다는 프랑스에 장기 ‘외유’한 ‘조선인 유생’이 맞다고 박 교수는 주장한다.(박선영, ‘김옥균 암살범 홍종우’, 2023)

김옥균과 홍종우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전문가들이 계속 연구해야 할 영역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들이 얼마나 역동적인 삶을 살았으며 이들과 이들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얼마나 복잡했는가이다. 또한 이들이 일본과 맺은 관계의 복잡성을 볼 때 한 인물과 역사적 사건을 단지 반일 민족주의로 재단하는 일이 얼마나 난센스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도 한국의 사극 등 대중역사물은 ‘민족주의자=선’, ‘외세와 결탁=악’의 공식을 만들고 그 공식에 짜 맞추기 위해, 입체적인 인물과 사건을 평면화하고 왜곡해왔다. 이런 문화에서는 김옥균과 홍종우 같은 복합적인 이들의 흥미로운 스토리는 설 자리가 없을 뿐 아니라, 지금 벌어지고 있는 긴박한 국제 정세조차 현명하게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문소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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