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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배의 퍼스펙티브] 관세 완화보다 중요한 ‘데이터 주권’…섣부른 양보는 금물

중앙일보

2025.06.19 08:24 2025.06.19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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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통상협상과 디지털 무역장벽 철폐 압박
김상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새 정부가 곧 풀어야 할 외교 난제 중 하나는 한·미 관세 협상의 타결이다. 다음 달 8일까지 합의되지 않으면 상호관세가 부과되는 상황에서 주요 품목의 관세를 타결하는 것이 큰 현안으로 닥쳐왔다.

아울러 이와 연계된 다른 사안에도 잘 대처해야 한다. 특히 관세를 인하해 주는 대신에 각종 비관세 장벽을 철폐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무마해야 한다.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략을 연상케 하는 미국의 압박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대미 수출 비중이 높은 자동차·철강·반도체 분야를 지키기에 급급해 자칫 미래 산업과 관련된 중요한 사안을 양보하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구글, 한국의 고정밀 지도 데이터 요구…미 무역대표부도 가세해
자율주행·스마트시티 등 AI 기술 테스트에 한국 활용하려는 속내
고정밀 지도에 다른 분야 데이터 결합하면 안보 취약성 커질 수도
제조업 관세 완화 위해 미래 자원인 데이터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그중 하나가 디지털 서비스 분야다. 미국 정부의 주장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미국의 기술정책 싱크탱크인 정보기술혁신재단(ITIF)의 로버트 앳킨슨 회장은 미국과 관세 협상을 타결할 실마리 제공 차원에서 한국이 디지털 무역장벽 완화 카드를 내놓는 성의를 보이라고 훈수를 뒀다. 미국이 지적하는 디지털 무역장벽에는 망 사용료 부과, 클라우드 보안인증제도(CSAP), 개인정보 국외 이전 제한, 인공지능(AI) 및 플랫폼 규제 등이 있다. 고정밀 지도 데이터 반출도 큰 논란거리다.

압박 수위 높이는 미국의 행보
구글이 2007년과 2016년에 이어 지난 2월 세 번째로 1:5000 지도 데이터 반출을 요청한 가운데 지난 3월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국가별 무역장벽보고서(NTE)에서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위치 기반 데이터 수출에 대해 제한을 유지하는 주요 시장”이라고 지적했다. 같은 달 미국 컴퓨터통신산업협회(CCIA)도 한국의 지도 데이터 반출 금지를 불공정 무역 관행으로 거론했다.

지난달 워싱턴 국제무역협회(WITA) 세미나에서 미국 측 패널들도 유사한 문제를 제기했다. 같은 달 열린 한·미 2차 기술 협의에서 미국은 6개 분야의 개선 요구 사항에 지도 데이터 반출을 포함했다. 만약 한국이 지도 데이터 반출을 거부할 경우 미국 측의 ‘관세 보복’이 떠오르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1:5000 지도 데이터 반출 요구에서 구글은 지도 서비스 편의성 제고, 관광 활성화, 신기술 접목 및 혁신 유발 등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국내 업체가 받을 심각한 타격, 공공 서비스의 의존도 심화, 데이터 주권의 훼손 등을 이유로 지도 반출을 제한했다. 이외에 군사 시설 및 민감 지역의 정보 노출 가능성도 쟁점이다. 이에 대해 구글은 ‘지나친 안보화’라며 군사 시설의 가림 처리를 거부해 왔다. 그런데 이번 요청에서 구글은 이를 선제적으로 수용하여 논란을 피하려는 몸짓을 보여줬다.

구글의 요청에 대한 처리 기한이 기존의 5월 15일에서 8월 11일로 연장됐다. 새 정부는 지도 데이터 반출 요청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는 새로운 논리를 개발할 과제를 안게 됐다. ‘디지털 쇄국’의 이미지를 풍기는 고리타분한 보호주의나 궁색한 국외 이전 금지의 담론을 극복해야 한다. 분단국가의 특수성을 앞세워 ‘안보 현실의 예외성’에 기대는 전통적 프레임도 넘어서야 한다. 디지털 시대의 보편적 트렌드에 부응하면서도 한국의 고유한 사정을 호소하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AI 산업에 지도 데이터는 필수
첫째, 구글이 고정밀 지도 데이터를 요구하는 속내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사실 지도 서비스만 놓고 본다면 1:2만5000 수준으로도 충분히 ‘길 찾기 서비스’의 제공이 가능하다. 구글이 굳이 ‘5000만 명 규모’밖에 안 되는 한국의 지도 데이터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내 데이터 자원의 양과 규모가 아니라 그 다양성 및 응용 가능성 때문이다. 실제로 구글이 요청하는 1:5000 지도에는 1:2만5000과는 비교할 수 없게 많은 정보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한국은 자율주행·스마트시티·디지털트윈 등 미래 AI 산업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디지털 인프라를 잘 갖추고 있다. 미래 플랫폼 산업의 테스트베드로서 최적의 환경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플랫폼 산업이 원활히 작동하는 데 필수적인 자원이 바로 고정밀 지도 데이터다. 이를 활용해 모든 미래 기술을 한국 테스트베드에 시험해 보고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하는 디딤돌을 마련할 수 있다.

특히 고정밀 지도 데이터는 구글의 AI 기술과 결합해 미래 비즈니스 창출을 위해 중요한 자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흔히 ‘원유’로 비유되는 데이터의 가치는 이를 추출하는 AI 기술 역량에 크게 의존한다. 구글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AI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구글에 한국의 고정밀 지도 데이터는 매력적인 자원이 아닐 수 없다.

둘째, ‘데이터 주권’의 담론도 새롭게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데이터 국외 이전을 제한하는 ‘방어적 주권’ 담론을 넘어 국내 생태계의 혁신을 도모하는 ‘적극적 주권’ 담론을 펼쳐야 한다. 실제로 막강한 자본력과 기술력을 보유한 구글이 국내 고정밀 지도 데이터를 확보한 후 공세에 나설 경우 대다수가 영세기업인 국내 지도업체들은 경쟁력을 잃고 구글이 주도하는 ‘디지털 제국 질서’ 안으로 단순 편입될 가능성이 크다.

‘쇄국의 담론’으론 방어 어려워
이런 과정에서 데이터 주권 담론은 국내 시장을 지키려는 ‘쇄국의 담론’을 넘어 구글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탈피하려는 ‘혁신의 담론’으로 재설정돼야 한다. 미국 주도 디지털 패권 질서하에서 그나마 ‘디지털 주권’의 공간을 지켜온 한국의 경험을 돌아보면 이러한 담론의 실현은 결코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만약에 그간 한국이 이룩한 인터넷·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플랫폼·AI 분야의 성과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디지털 한국’이 있었을까?

국내에서 생성된 데이터가 국내 업체들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다시 투입되는 선순환 구조를 조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내적 혁신뿐 아니라 해외 진출의 토대도 마련해야 한다. 바깥의 디지털 세상은 급변하고 있는데 문을 걸어 잠그고 지키기만 해서는 오히려 더 많이 잃을 수 있다. 데이터 주권을 주장하더라도 혁신의 보편성에 기대야만 지도 반출 요청과 같은 이슈에 맞서는 방어의 논리 자체도 힘을 받을 수 있다.

‘데이터 안보관’도 재정립 필요
끝으로 ‘데이터 안보’를 보는 시각도 새로이 세워야 한다. 지금 쟁점이 되는 것은 군사·안보적 속성을 지닌 데이터의 유출만은 아니다. 여기서 논하는 데이터 안보는 아날로그 시대 ‘스몰 데이터’의 전통안보 문제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 ‘빅 데이터’의 신흥안보 문제다. 다양한 분야에서 거대 규모의 데이터를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AI 기술로 분석·처리하면, 그 과정에서 데이터 생성자도 몰랐던 새로운 안보 위협의 패턴이 드러날 수 있음을 경계하는 문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고정밀 지도 데이터는 교통·치안·에너지·재난관리·경제안보·군사전략 등에 걸친 다양한 국가안보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다. 각 분야에서 생성된 데이터를 서로 결합·분석하는 과정에서 단순한 지도 데이터 유출 이상의 새로운 안보 취약성이 드러날 수도 있다. 최근 각국 국가 정보기관들이 민간 기업들까지 내세워 이러한 데이터 안보의 틈새를 파고드는 ‘데이터 인텔리전스(DATINT)’ 활동을 벌이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조업 마인드에 갇히지 말아야
최근 미국이 중국 기업들의 데이터 유출에 대해서 우려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미국 시장에 진출한 중국 기업들의 데이터 유출 행위의 이면에 중국 당국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5G·틱톡·테무·딥시크·CCTV·항만크레인 등이 사례로 거론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데이터 안보의 행보를 보이는 미국이 한국에 고정밀 지도 데이터를 요구하고 있다. 만약에 중국의 인터넷 지도 서비스 업체인 바이두가 미국의 고정밀 지도 데이터 반출을 요청한다면 미국은 어떻게 반응할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지난 4월 한·미 재무·통상 ‘2+2’ 고위급 협의에서 한국 정부가 제조업 분야의 관세 완화를 위한 협상 카드로 고정밀 지도 데이터를 내줄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 바 있다. 미국 측도 디지털 무역장벽이 한국에 큰 부담이 아니어서 타협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제조업 마인드에 갇혀서 미래 산업의 원유 격인 데이터 자원을 너무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당장 급한 현안 해결에 밀려서 미래 이슈를 섣불리 놓치지는 말아야 한다. 자동차·철강·반도체가 ‘오늘’이라면 데이터·AI·플랫폼은 ‘내일’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김상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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