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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의 시선] ‘협상의 기술’이 트럼프 전유물은 아니다

중앙일보

2025.06.22 08:24 2025.06.22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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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논설위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협상의 달인’으로 통한다. 어떤 사안이 있으면 일단 질러놓고 본다. 예컨대 “캐나다는 미국의 51번째 주로 들어와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휴양지를 짓자”라고 한 건 지르고 보는 트럼프식 협상 스타일의 전형이다. 그 과정에서 상대방에겐 겁박에 가까운 충격적인 제안을 한다. 상대방이 기가 질릴 정도로 냉혹하고 단호한 태도로 거래를 압박한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백악관 회담은 분노와 압박을 앞세운 트럼프식 거래의 전형을 보여줬다. “당신은 쓸 카드가 없어!” 러시아 침공에 맞서 4년째 피 흘리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말을 안 들으면 대응 수단이 없다는 통보였다. 우크라이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지난 4월 30일 미국에 광물 공동 개발권을 내놓았다. 안보에 공짜는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보여줬다.

한국은 미국 원하는 것 다수 보유
조선·반도체·건설 협상 카드 많아
양국 모두 만족하는 해법 찾아야

트럼프가 전 세계를 상대로 벌이는 관세전쟁에서도 ‘협상의 기술’이 펼쳐지고 있다. 주요 교역 대상국에 상호관세를 퍼붓고 압박을 가한 뒤 개별적으로 협상을 벌여 이익을 취한다. 한국·일본 등 ‘우선 목표’ 5개국과는 별도로 협상을 벌인다. 이런 압박에 더해 트럼프는 ‘비관세 부정행위 8개 유형’을 제시하며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이 기준에 따르면 한국은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제한, 구글이 요구해 온 고정밀 지도의 해외 반출 제한이 비관세 장벽으로 꼽힌다.

천만다행인 것은 한국은 의외로 ‘대응 카드’를 많이 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쓸만한 것으로 여러 개 있고, 트럼프가 매우 탐내는 것들이다. 반도체·자동차·조선은 물론이고 건설 분야에서도 한국의 협력이 절실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에서 반도체 공장을 가동하거나 건설 중이다. 미국 영토 내 반도체 생산 체제 구축에 한국은 필수적 협력 파트너다.

자동차는 현대차가 120만대 생산 체제를 구축하기로 했고, 자동차에 사용될 강판을 만드는 첨단 제철소까지 건설된다. 백악관에서 정의선 회장이 트럼프를 직접 만나 210억 달러 투자를 약속했다. 이런 약속을 받고도 트럼프는 한국에 대해 25% 세율의 상호관세 폭탄을 투하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국방비 증액과 함께 주한미군 주둔 비용을 더 내놓으라는 압박도 서서히 가해오고 있다. 마치 ‘봉 잡았다’는 듯한 태도다.

하지만 트럼프의 ‘거래의 기술’은 많은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4월 초 전 세계를 향한 관세 충격이 ‘R(경기둔화)의 공포’를 일으켜 미 국채 금리가 급등(채권값 하락)하자 트럼프는 즉각 중국 이외의 나라들에 대해 90일간 상호관계를 유예했다. 채권 금리 급등으로 36조 달러에 달하는 미 연방 부채는 이자 부담에 비상이 걸렸다. 이런 우려 때문에 트럼프가 고집을 꺾었다는 해석이 나왔다.

트럼프는 중국과도 타협점을 모색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지난 5일 90분간 통화하며 무역협상을 재개하기로 했다.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 카드가 트럼프의 강경책을 누그러뜨렸다. 미국이 한국으로부터 무엇을 필요로 할지도 명확해졌다. 반도체와 자동차 공장 외에도 미국은 조선업 재건에 한국의 도움을 바라고 있다. 지난 3월 13일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을 나서는 미 해군 군수지원함 쉬라의 모습은 미 해군을 놀라게 했다. 난파선의 모양새로 입항했던 이 배는 새 배로 태어났다. 미국은 제조업을 등한시한 나머지 지금은 세계 선박 건조 시장 점유율이 1%에 그친다.

알래스카 개발에도 한국의 건설업 역량이 필요하다. 미국은 알래스카에 배송관을 설치할 능력이 없다. 눈이 많고 땅이 어는 날이 많아 공사 자체가 어렵다. 일본과 대만은 협력 의사를 밝혔다. 한국 역시 덥석 떠맡을 건 아니지만, 더 큰 이익을 위한 수단이라면 협상 자체를 피할 이유는 없다.

트럼프는 캐나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에서 돌연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란-이스라엘 사태의 긴박성 때문이라고 해도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을 갑자기 취소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조만간 한·미 정상회담이 다시 추진될 텐데, 한국은 조바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중국의 희토류 카드처럼 한국도 쓸만한 카드가 있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양보할 건 하되, 지난 16일 기내에서 밝힌 것처럼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상황이 안 되도록” 협상의 기술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가 쥔 카드의 가치부터 잘 파악하고, 우리의 카드가 미국에 어떻게 도움이 될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팩트를 눈앞에 들이대는 상황에선 트럼프도 막무가내로 나오진 못할 것이라고 본다.





김동호([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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