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정세가 급격히 악화하면서 한국은행 고심도 깊어졌다. 최근 서울 집값과 가계 대출이 들썩이는 가운데 기름값 급등에 따른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돌발 변수까지 등장했다. 한은으로선 금리 인하 같은 ‘완화적 통화정책’ 경로를 유지하는 게 어려워졌다.
물가를 끌어올릴 최악의 시나리오는 세계 주요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는 경우다. JP모건은 이곳이 막히면 난방·운송 연료와 플라스틱 제조 등 일상생활에 쓰이는 원유 가격이 최대 배럴당 130달러까지 솟구칠 것으로 전망했다. 23일(현지시간) 기준 75.73달러인 미국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이 앞으로 72% 더 뛸 수 있다는 의미다.
더욱이 한국으로 오는 중동산 원유의 99%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유가가 10% 오르고 환율도 10% 상승(달러당 원화가치는 하락)하면 국내 기업 원가 부담은 2.82% 는다고 분석했다.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면 ‘물가 안정’을 중시하는 한은 입장에선 추가로 기준금리 인하를 택하는 게 쉽지 않다. 한은이 올해 상반기 두 차례(2월과 5월) 기준금리를 낮췄던 것도 국제유가 하락으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목표치인 2%(전년 대비) 안팎에서 움직였기 때문이다.
미국 기준금리가 ‘4%대’로 유지된다는 점도 한은의 통화정책에 영향을 준다. 미국과 한국 간의 금리 격차가 더 벌어지면 외국인 자금 유출 압력이 커진다. 현재 미국 기준금리는 연 4.25~4.5%로 한국(2.5%)보다 최대 2%포인트 더 높다. 문제는 인플레이션을 자극할 유가가 뛰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장기간 금리를 묶을 수 있다는 점이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현실화되면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4%에 육박하고, 국제유가가 배럴당 130달러까지 치솟으면 연말 CPI는 6%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유상대 한은 부총재는 23일 ‘비상 대응 태스크포스(TF) 회의’에서 “앞으로 이란 대응 수위 등에 따라 글로벌 위험 회피 심리가 한층 강화될 수 있으며, 국제유가 불안 등으로 글로벌 경기·물가 여건 불확실성이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