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는 건 눈으로 어루만지는 것이어서/ 그걸 자기 마음속으로 끌어오는 것이어서/ 사람은 눈을 잘 보호해야 한다네”. 박노해의 시 ‘눈을 씻고 가자’의 한 구절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어루만지는 일은 ‘바라보기’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것 역시 눈으로 어루만지는 행위, 아름다움에 대해 경탄과 사랑을 표하는 한 방법입니다. 최근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겸재 정선’전을 보며 이 시구가 떠올랐습니다. ‘금강내산’ ‘총석정’ ‘정양사’ ‘필운대상춘도’ ‘세검정’, 그림 한 점 한 점을 보며 그리기에 앞서 이 풍경 앞에서 감탄했을 화가 정선(1676~1759)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정선이 80대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통천문암도(通川門岩圖)’는 강원도 통천군 해안 풍경을 담은 것으로, 넘실거리는 파도를 화면의 상단까지 그려 넣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수직의 바위 절벽을 둘러싸고 굽이치는 물결이 바다의 웅장한 기운을 느끼게 합니다. 정선이 나무와 바위, 그리고 파도에 바치는 러브레터 같습니다.
‘계상정거(溪上靜居)’는 이황의 도산서원이 건립되기 전, 이황이 도산서당의 완락제에 앉아 있는 모습을 담은 작품입니다. 현재 도산서원 모습과 비교하면 훨씬 소박한 풍경인데, 서당 뒤의 도산과 서당 앞 왼편의 천광운영대와 오른편의 천연대의 모습이 친근합니다. 도산서원은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모두 먼 길을 떠나 그려진 것은 아닙니다. ‘서원소정도(西園小亭圖)’는 인왕산 기슭 작은 정원의 정자를 그린 것인데요, 소나무와 작은 계곡이 있는 그곳이야말로 꿈의 정원 같습니다. 같은 동네에 살며 정선과 교유했던 문인 이춘재(1692~1761)가 자신이 49세가 된 것을 기념해 후원에 정자를 짓고 정선에게 그려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번 ‘겸재 정선’전에서 다시 빛을 발하는 것은 정선의 대표작 165점만이 아닙니다. 이 미술관을 품고 있는 숲과 호수 등의 자연입니다. 이미 4월에 전시를 찾은 관람객은 미술관 주변을 황홀하게 뒤덮은 벚꽃을 보았겠지요. 지금은 온통 초록 세상입니다만,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진 그 자연이 전시장 안 미술 작품과는 또 다른 감동을 줍니다.
미술관엔 1997년에 조성된 한국 전통 정원 ‘희원(熙園)’도 있습니다. 30년 가까이 그곳에서 세월을 입은 나무와 풀, 그리고 돌들이 거기서 자연스럽게 ‘작품’이 되었습니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연 조경가 정영선은 “한국의 산천이야말로 신이 만든 정원이자 천국”이라고 말했습니다. 겸재 정선이, 그리고 호암미술관이 우리를 둘러싼 진짜 예술 작품이 뭔지 알아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겸재 전시는 29일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