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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그대를 해독한다

중앙일보

2025.06.23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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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일로 하루를 보낸다. 나의 경우 제일 어려운 것이 시집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일이다. 한 권의 시집을 말하기 위해 시인의 모든 시집을 찾아 책방을 뒤질 때가 있다. 지인들에게서 종종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암호로 보이던 시어가 해독되는 순간 시인과 내가 공명한 것 같다.

서평은 학문의 영역이 된 평론과 달리 독자가 그 시집을 읽어보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시가 내 가슴에 먼저 닿으면 그 느낌을 독자들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려면 시인의 전 생애를 파고드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살았는지 왜 썼는지 내가 먼저 이해해야 한다. 나는 시의 완성은 낭송이라고 믿었다. 마지막으로 시를 입술에 올리면 시인의 호흡이 느껴졌다.

시는 해독되길 기다리는 암호
사람 간 소통도 시만큼 어려워
최선 다해 그대를 읽었더라면

이상 『오감도』
어린 시절 여름밤 돗자리에 누워 배터리를 고무줄로 감은 라디오를 들었다. 가끔 잘못 맞춘 주파수에서 여자가 규칙적으로 숫자를 읽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암호를 송출하는 난수방송이었다. 반복의 효과였는지 귀를 기울이다 보면 스르르 잠이 들었고 소리는 밤하늘로 사라졌다. 오래전에 본 장 콕토의 흑백 영화 ‘오르페우스’에도 그런 장면이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현대물로 촬영한 작품이었는데 자동차 라디오에서 음악이 아닌 알 수 없는 문장과 숫자가 계속 흘러나왔다. 먼저 세상을 떠난 시인 친구가 저승에서 이승으로 시를 송출하고 있었다. 송출 언어는 텍스트가 아닌 난해한 문장과 숫자였다. 오르페우스는 암호를 해독해서 자신만의 시를 쓰지만, 표절했다는 오해를 받는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장 콕토에게 시는 이승과 저승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시는 여기도 저기도 아닌 시인의 세상에서만 존재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엉뚱하게 이상의 시 ‘오감도’와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떠올렸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시인은 자기의 시에 암호를 숨긴다고 생각했다. 해독해 줄 독자를 찾기 위해 시인은 세상에 시를 송출한다. 단 한 사람의 독자일지라도 자신의 시를 알아보기를 소원할 것이다. 암호를 풀 듯 시인을 해독하는 일, 시의 분류나 분석이 아니라 시인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 시인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시인의 시어는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않으려는 완고함이 느껴진다. 읽을 수도 없는 뒤집힌 숫자의 시가 이상의 ‘오감도 시제 4호’였다. 얼마 전 그의 시를 물리학으로 해독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난수를 받아 적은 듯한 그의 시는 마치 낯선 외국어처럼 생경했다.

작가 존 쿳시는 자신의 작품에서 “시는 모국어로만 쓸 수 있다”라고 했다. 외국에서 만난 두 연인은 서툰 영어로 소통하는데 모국어만이 갖는 감성이 전달될 리 없다. 두 사람의 대화는 시종일관 겉돈다. 남자는 죽기 전 자신의 모국어로 시를 써서 그녀에게 바친다. 번역된 시의 감성이 외국 여자에게 오롯이 전달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여자는 이해했다고 오해했을 것이다. 시가 반드시 공감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왜 썼는지는 알아야 한다.

시뿐만이 아니라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도 벽에 부딪힌다. 상대방과 내가 동일한 문장을 두고 전혀 다른 뜻으로 대화하는 경우다. 그럴 때는 미세한 표정 변화로 진의를 읽어내려 한다.

상대방을 이해했다고 믿지만, 결과적으로 오해인 경우가 더 많았다.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골은 깊었다. 그래서 말이 아닌 글로 소통하려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해와 이해를 반복하는 일이 삶이 아닌가 생각될 때도 있다.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되어보라고 한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아니, 이해는 못 해도 공감할 수는 있으리라. 가벼운 인연에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서평을 쓰다가 정말 내가 시인을 이해한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면 일어나 밤하늘을 바라본다. 내 어린 날의 여름밤으로 돌아가 내 기억 속 오래된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춘다. 나의 라디오에서 난수 방송이 흘러나온다. 해독할 주인을 찾지 못한 시가 귓가에 맴돌았다. 운 좋게 시 속으로 들어가 시인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 시는 음악이 되어 우주를 가로질러 별을 찾아 떠나는 것 같다.

시를 해독하려는 노력만큼 인간을 이해했다면 내게 그 많은 불면의 밤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오해했거나 나를 오해해서 떠나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가끔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해독해야 할 시처럼 보인다. 나의 어리석음으로 내가 미처 읽어내지 못한 그대가 시간을 두고 나를 반복해서 읽어주기를 바란다. 여름밤을 날았던 오래된 라디오의 소리처럼 우리가 손을 잡고 우주로 날아가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시를 해독한다. 오늘 그대를 해독한다.

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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