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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호의 시시각각] ‘과제 중심형 대통령’이 성공하려면

중앙일보

2025.06.23 08:28 2025.06.2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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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호 논설위원
국정기획위원회가 ‘군기 잡기’ 논란에 휩싸였다. 부처 업무보고 첫날, 기획재정부를 향해 “공약 이해도가 떨어진다”(이한주 국정기획위원장)고 질타했다. 대검찰청·방송통신위원회·해양수산부 보고는 도중에 중단됐다. “공직사회가 세상 바뀐 것을 인지하지 못하나” 같은 으스스한 발언도 있었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완장 찬 행태가 가관”이라고 했다. 야당 비판이 일리 있다. 계엄과 탄핵, 선거 국면에서 흐트러진 공직사회의 기강을 세우고 싶었겠지만 좀 과했다. 아무리 퇴임을 앞둔 장관이지만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판국에 부처 공무원들이 지난 정부의 정책을 ‘반성’하고 대선 공약 이행을 위한 정책 보따리를 적극적으로 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바람보다 빨리 눕는’게 관료사회
공약 이해도보다 민감도가 더 문제
국정기획위, 대선 공약 다듬어야
이한주 국정기획위원회 위원장(오른쪽)이 지난 18일 오전 세종시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기획재정부 업무보고에 앞서 조승래 대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뉴스1

국정기획위가 ‘공약 이해도’를 거론한 대목은 특히 문제 있다. 관가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런 말은 안 하는 게 좋았다. 대선에서 당선이 유력한 후보의 공약은 일찌감치 관가의 ‘선행학습’ 대상이다. 공약 이해도가 아니라 관가의 공약 민감도가 더 걱정이다. 김수영 시인이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시로 외압에 굴복하지 않는 민중의 생명력과 저항정신을 노래했는데, 바람에 눕는 속도만 따지면 공무원도 뒤지지 않는다. 공무원을 향해 호통치고 윽박질러서 공약 그대로 100% 이행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관료의 전문성을 충분히 활용해 공약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 부작용과 이행 비용을 줄이는 게 옳은 방향이다.

각 부처는 이미 대선 공약과 새 정부 코드에 맞춰 움직이고 있다. 상법 대신에 자본시장법 핀셋 개정을 주장했던 법무부는 상법 개정을 지원하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고용노동부는 주 4.5일제 이행안을 내놨다. 새 정부의 정책 기조는 임금 삭감 없는 근로시간 단축이다. 주 52시간제를 주 48시간으로 줄이는 4.5일제 도입은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권인 한국의 노동생산성을 더 떨어뜨릴 것으로 재계는 우려한다. 고용부는 또 기업들이 원하는 ‘퇴직 후 재고용’이라는 표현 대신 임금체계 개편에 대한 언급 없이 정년 연장을 위한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보고했다. 이처럼 안 그래도 애써 정부와 코드를 맞추려는 게 관료의 생리인데, 국정기획위 등 새 정부 주도층이 완장을 찬 것처럼 권위적으로 찍어누르려는 식은 곤란하다. 공무원의 솔직하고 전문적인 피드백을 제대로 받기 어렵고, 무리한 정책이 양산될 것이다.

김용범 국정기획위원회 부위원장, 이한주 위원장, 진성준 부위원장, 방기선 부위원장(왼쪽 두 번째부터) 등 참석자들이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에서 열린 국정기획위원회 현판식에서 현판 제막을 마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부처의 업무보고를 훑어보면 공약을 최대한 다듬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고용노동부는 주 4.5일제를 도입한 기업에 세액공제 등 혜택을 주고 신규 인력을 채용하면 인건비를 지원하는 ‘실근로시간 단축 지원법’을 제정하겠다고 했다. 일회성 인센티브라는 한계는 있지만 그래도 단계적으로 접근해 충격을 줄이려는 고육책이다. ‘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노란봉투법)도 원청의 교섭 대상이 과도하게 늘어나지 않도록 ‘실질적인 지배력’을 시행령에서 명확하게 하는 등의 대안을 마련했다. 기업들의 걱정을 불식하기엔 턱없이 모자라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다.

국정기획위의 핵심 과제는 새 정부 100대 과제 선정이다. 지자체들은 자신들의 개발 공약을 여기에 끼워넣으려고 총력전을 벌인다. 솎아내야 한다. 국정기획위와 새 정부 장관 후보자 중엔 전·현직 의원이 대거 포진해 있다. 정치인 장관은 추진력과 대국회 관계가 강점이지만 관료와의 쌍방향 소통이 잘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공약은 현실에 맞게 100대 과제로 다듬어져야 한다. 관료에게 종주먹만 들이대지 말고 잘 활용하기를 바란다. 이재명 대통령이 과거 민주당 계열 대통령들과 달리 가치 중심이 아니라 과제를 따박따박 해결하는 ‘과제 중심형 리더’(유시민 작가의 표현)라고 하기에 하는 말이다. 과제가 좋지 않으면 ‘과제 중심형 리더’가 아무리 유능해도 성공할 수 없다.




서경호([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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