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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이재명의 국민주권 정부

중앙일보

2025.06.2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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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 정치학자
조기 대선 국민총회는 끝났다. 행정수반은 교체되고 여야는 위치를 바꿨다. 예정에 없던 총회를 왜 열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국민의 결정’은 합리적이었다. 그런데 총회를 계속해야 하고 통치의 권한을 국민이 직접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헌법에 있는 ‘국민주권’ 원리를 일상적으로 구현해야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대통령이 ‘국민주권 정부’를 내세운 것도 같은 뜻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민주권은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원리다. 잘 쓰면 민주적이지만 잘못 쓰면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 게 국민주권이다. 미국의 남북전쟁도 시작은 국민주권이었다. 새로 편입될 주가 노예제를 허용하는 주가 될지 아닐지를 해당 주의 주민이 결정하게 하자는, 인민주권론자들이 주도한 입법이 시발점이었다. 그로 인해 해당 주는 물론 미국 사회가 양편으로 나뉘어 적대했고, 결과는 내전이었다.

주권과 권리의 균형이 민주주의
국민주권 일상화는 분열·적대 키워
권력자가 국민주권 동원하면 위험
다원 민주주의가 더 자유롭고 평등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의 관계를 버나드 크릭(Bernard Crick)만큼 재치 있게 설명한 학자도 드물다. 영국을 대표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자이자 시민 교육자로서 그는 평생을 ‘정치 있는 민주주의’, 다시 말해 정치의 역할이 존중되는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이론가로 살았다. 그의 책 『정치를 옹호함』(후마니타스)에 따르면 국민주권과 민주주의는 부모-자식 관계와 같다. 국민주권이 민주주의의 모태 원리이긴 하나, 자식이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에게 의존하거나 반대로 부모가 자식이라고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듯, 성숙한 민주주의라면 선거 이후에는 주권을 나눠서 위임받은 여야가 정치의 방법으로 공동체를 운영해야 한다는 뜻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주권 말고도 친구가 많다. 입헌주의 없는 민주주의는 없다. 의회 민주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도 없다. 삼권분립이나 복수정당을 불허하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 국민주권과 충돌하는 경쟁 원리들이다. 민주주의는 나쁘게 말하면 친구 관계가 복잡하고, 좋게 보면 경쟁하는 여러 친구 원리를 통해 인간 사회의 변화에 잘 대응해 왔다.

성공의 비결은 ‘주권’과 ‘권리’를 나눈 것에 있었다. 시민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권리를 갖는다. 대신 정부를 움직이는 주권의 힘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선출된 대표에게 위임한다. 이에 승복하지 않고 선거 부정을 함부로 주장하는 것은 주권을 무력화하는 범죄다.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은 권리를 위협하는 범죄다.

권리를 가진 시민은 자유롭고, 주권을 위임받은 정부는 책임지는 것이 민주주의다. 지난 대선에서 우리는 정부를 잘못 운영한 책임을 물어 주권의 위임 대상을 바꿨을 뿐, 새 대통령에게 일상적으로 주권을 동원할 자유나 시민의 권리를 위협할 권력을 갖게 하려고 투표한 게 아니다.

국민주권론의 창시자라 할 장 자크 루소의 설명은 큰 도움이 된다. 그에 따르면 국민은 ‘소극적인 전체’이고, 시민은 ‘적극적인 부분’이다. 입법자와 통치자를 뽑는 전체 총회에서 주기적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은 국민의 ‘일반 의지’다. 그것이 주권의 향배를 결정한다. 선거와 선거 사이, 즉 전체 총회가 없는 일상에서 발양(發揚)되어야 하는 것은 시민의 평등한 권리다. 그래서 루소는 주권과 권리를 구분하지 않은 채 일상의 통치에 인민이 주권을 행사하게 한 아테네 민주주의에 몹시 비판적이었다.

일상적으로 활성화할 것은 국민 주권이 아니라 시민 권리다. 약자들도 평등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다. 루소는 1년에 한 번 정도 전체 총회를 열어 국민의 일반 의지를 확인하고 주권의 향배를 결정하길 바랐는데, 지금 우리는 대선과 총선, 지방선거를 통해 평균 1.4년에 한 번 정기 총회를 열고 있다. 그 사이는 다양한 시민의 자유의사가 허용되고, 주권을 위임받은 여야가 책임 정치를 해야 한다. 그게 잘못돼서 이번처럼 비상 총회를 열어 정치 위기를 해소해야 했는데, 그런 비상 총회를 계속 또 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주기적으로 확인해야 할 국민 주권을 일상적으로 동원하면 과거 프랑스 혁명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 혁명-반혁명의 악순환이 이어진다. 목소리 큰 소수가 지배하고, 상대와 끝장을 볼 때까지 증오를 최대화하는 일도 피할 수 없다. 오늘날에는 같은 잘못을 대통령들이 한다. 그들은 마땅히 복원해야 할 여야 간 정치 대신 국민과의 소통만 찾다 몰락했다. 국민주권과 직접민주주의의 애용자도 대통령들이었다.

달라져야 한다. 대통령이 야당을 만나면 야당 시민을 얻는다. 야당과 야당 시민이 동의해야 입법의 정당성도 커진다. 다양한 정당에 의해 다양한 사회적 요구가 대표되고 실현될 수 있어야 정치가 안정된다. 이것이 주권을 한 당에 몰아주는 일당제보다 다당제가 훨씬 더 강력한 민주적 효과를 발휘하는 이유다. 더 국민주권적이기보다 더 다원적이어야 자유롭고 평등하다.

박상훈 정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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