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기 직업에서 2~3년 차일 때보다 10~20년 차일 때가 더 좋은 이유는 피상성에서 더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경험이 쌓여도 세계는 너무 깊어 냇가에서 물장구치는 느낌은 여전하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세상의 단면적이 넓다는 데 있다. 새로워지려고 보폭을 넓히면 다시 겉에서 얼쩡거리는 것만 같다.
사는 것은 과정의 연속이고, 매일 조금씩 다르게 반복하는 일이다. 과정은 중간에 한 번씩 매듭을 지어줘야 하고,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는 그렇게 탈 수 있다. 책 만드는 편집자는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의 원고를 교정 보는 일이 흔하다. 그게 이 직업의 매력이다. 배울 수 있다는 것, 의욕을 내는 만큼 넓고 깊게. 역자들 또한 전문 지식이 없어도 번역에 뛰어든다. 김태성 번역가처럼 일생 중국어권 소설만 150권 옮기며 깊이로 쌓아 올리는 부류도 있지만, 매번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이도 많다.
텍스트와 세상은 너무나 깊어
충분히 읽고 체험하지 않으면
피상적 파악 벗어나기 어려워
반면에 글 쓰는 저자는 다르다. 최근 나는 라훌 바티아가 쓴 우파 힌두 민족주의에 관한 원고를 편집하면서 몇 권의 인도 관련 책을 읽었다. 그중 하나는 이광수 교수가 번역한 우르와시 부딸리아의 저술이었다. 이 교수는 원래 연구재단 지원으로 인도인 디아스포라 연구를 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문헌 조사와 함께 10여 명의 난민을 인터뷰하면서 그는 자신이 이 주제를 너무 가볍게 판단했으며, 학자로서 인간의 아픔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치명적 오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잘된 연구물을 번역하는 것으로 방향을 돌렸는데, 학자의 이런 성찰적 고백이 서문에 나온다는 것은 놀라웠다. 대개의 저자는 겸양의 뜻으로 ‘책에 있는 오류는 모두 내 책임이다’ 정도만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런 고백은 전공자로서 용감한 것이고, 편집자에게도 매 순간 자신을 넘어서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를 고민하게 만든다. 글이든 만듦새든 마무리를 지을 때는 타협하게 되는데, 내가 가진 재능이 한정된 데다 들일 시간과 돈도 얼마 없기 때문이다.
라훌의 책을 시작할 때 나는 1947년 인도·파키스탄의 분리, 1992년 바브리 마스지드 모스크 철거 때문에 불거진 힌두교도·무슬림 간의 대립 격화, 그리고 분쟁 지역 카슈미르에 대한 약간의 지식밖에 없었다. 요즘 편집자들은 판매 촉진자로서의 활동을 강화해가고 있다. 반면 나는 책상과 텍스트 곁을 떠나면 불안해하는 성격이다. 머리와 발이 잘 혼합되지 않는다. 그래서 새롭게 시도하는 일이라 봤자 독자에게 엽서 쓰기와 출판사의 레터 발행 정도다. 둘 다 신간 보도문과는 다른 글쓰기를 요구해 편집자의 밑천이 금방 드러날 수 있다. 밑천을 마련하려면 계속 확장하며 읽어야 하는데, 책 한 권에 할당할 수 있는 편집 기간은 길지 않다. 라훌의 책에 대해 짧은 글을 쓰려고 나는 인도·파키스탄 역사책 몇 권과 아룬다티 로이, 살만 루슈디의 소설 및 회고록을 모두 읽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편집은 좁은 시야와 세밀한 작업을 요구하는 터라 독서 계획은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번 책을 편집하면서 나는 시간의 겉을 핥고 지나간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꼈다. 단순히 그 분야 독서를 충분히 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더 큰 이유는 내가 인도·파키스탄인들을 이주노동자로만 여겨서다. 집 근처 금촌시장에 가면 그들을 쉽게 마주치지만 그들 나라와 처지에 대해 한 번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서다.
시간은 덥석덥석 물리는데, 거기서 매듭을 단단히 짓지 않으면 해치우듯 사는 것 같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은 때로 표면에만 머물다 그친다. 오히려 묵은 것과 고요가 호기심을 넘어 지배할 때 삶을 다른 음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우파 힌두 민족주의는 현재 인도에서 세속주의를 부정하며 정치사회 체제로 침투하는 극단적 종교성을 보이고 있다. 이때 정치에 초점을 맞춰 민주주의의 후퇴를 논할 수도 있지만, 거꾸로 종교 깊숙이 들어가 그들을 이해해볼 수도 있다.
딩옌이라는 중국 소설가는 작품에서 대부분 티베트 소수민족과 서역 지방 사람들 종교 간의 이질성을 다룬다. 그녀는 서로의 삶을 낯설어하는 두 민족의 일상을 히말라야 설산처럼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소설 속 어느 구절을 읽든 무슬림들은 손님과 담소하다가도 해질녘이 되면 어김없이 매트를 깔고 기도하는 모습, 굶주림을 참다가 금식 시간이 해제된 후 이프타르(라마단 기간 무슬림의 저녁 식사)를 나누는 모습, 자기 자신조차 설득 못 하는데 수행이 무슨 의미냐며 흔들리는 모습이 더없이 생생하게 드러나 무슬림의 생활을 단번에 그려볼 수 있다.
삶은 비밀을 함부로 내주지 않는다. 삶에서 겉도는 느낌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유와 살의 맞댐이 모자란 데서 비롯된다. 그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으면 삶은 때로 위협이 되고,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