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를 구원할 가치가 있는가?” 지난 7일 미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 오피니언 면에 실린 글의 제목이다. 소속 필진 7명에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정부의 압박으로 위기에 처한 하버드대의 존재 가치를 묻고 각자의 답변을 실었다. 읽기 전엔 다수가 하버드의 손을 들 거라 짐작했다. 그간 WSJ의 사설이 줄곧 “정치 선동으로 대학을 파괴한다”며 트럼프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글의 결은 예상과 달랐다. 7명 중 3명은 “국가적 자산”이란 논리로 학교의 가치를 옹호했지만, 다른 3명은 독설에 가까운 비판을 쏟았다. “자기 개혁을 거부하는 거대기업”이라 부르며 “대중의 눈엔 (하버드가) 선한 일보다 악한 일을 많이 한다”고 꼬집었다.
하버드, 트럼프 공세에 위기 직면
“그들만의 대학” 대중 반감도 배경
총장 “공공의 비판에 귀 기울여야”
눈길을 끈 건 나머지 1명의 답변이었다. 세계 최고의 연구기관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동문 자녀를 우대하는 ‘레거시 입학’ 관행을 언급하면서 부·권력의 세습 통로가 된 대학을 도울 순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성경 구절에 빗대 “하버드여, 스스로를 구원하라(Harvard, save thyself)”고 썼다. 트럼프의 초법적인 조치엔 동의할 수 없지만, ‘그들만의 대학’에 안주해온 하버드도 달라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듯했다.
올해 설립 389주년을 맞는 ‘미국보다 오래된 미국 대학’ 하버드대가 정치권력과의 갈등에 유례없는 위기에 몰렸다. 정부의 일방적인 외국인 학생 비자 취소 등에 법원이 일단 제동을 걸었지만, “법정에서 승리해도 장기전에선 패배할 것 같다”(워싱턴포스트)는 우려가 이어진다. 당장 재학생은 보호할 수 있겠으나, 향후 새로운 해외 인재를 유치하는 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또 자금 지원 중단에 이어 면세 혜택 박탈, 기부금 수익에 ‘세금 폭탄’을 매기겠다는 트럼프 측 방안이 실현되면, 기금이 532억 달러(73조원)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대학’ 하버드도 한해 15억 달러(2조원) 규모의 연구비를 충당하는 게 불가능하다. 때문에 “몇 년 안에 그저 그런 대학으로 전락할 수 있다”(로렌스 서머스 전 하버드대 총장)는 경고까지 나온다.
트럼프의 하버드대, 아이비리그 때리기는 실상 정치적 공세다. 2023년 하마스의 이스라엘 습격 이후 불거진 반유대주의 시위와 대학들의 느슨한 대응이 빌미가 됐지만, 앞서 집권 1기와 정권을 잃었던 4년 내내 트럼프 진영은 꾸준히 ‘대학은 적’, ‘좌파 엘리트주의의 소굴’이라고 공격해왔다. ‘학문·표현의 자유를 훼손하고 국가의 과학기술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학계·언론의 비판이 거세지만, 트럼프에겐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그가 가장 우선시하는 지지층 결집에 큰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지난달 여론조사(AP뉴스)에서 공화당 지지자 10명 중 8명은 트럼프의 대학 정책을 지지한다고 응답했는데, 경제 등 다른 분야보다 지지도가 높았다.
트럼프의 선동이 효과를 얻는 배경엔 대학에 대한 미국인의 신뢰 하락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해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중 ‘대학교육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응답 비율이 68%에 이른다. 10년 전 조사에서 10%에 머물렀던 ‘대학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32%로 뛰었다. 이념 편향 논란과 함께 교육의 질, 비싼 학비, 입시 불공정 문제 등 누적된 불만이 함께 작용했다. 닭(트럼프의 선동)이 먼저였는지, 달걀(신뢰 하락)이 먼저였는지 딱 집어 말하긴 어려워도, 둘이 함께 반(反) 대학 정서를 지피는 땔감이 되고 있는 건 분명하다.
맥락과 상황이 다르다고 딴 나라 얘기로 넘길 일만은 아니다. 학령인구 감소, 장기간 등록금 동결과 빈약한 정부 지원에 대다수 국내 대학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다. 그런데도 국민과 정치권은 대입, 취업에만 관심을 쏟을 뿐 대학의 절박한 호소엔 귀 기울이지 않는다. 대학 진학률 세계 최고인 나라라곤 믿기 힘든 일인데, 어쩌면 국민 사이에 누적된 불만, 불신 때문 아닐까 싶다. 오랜 기간 개혁·혁신을 거부하며 ‘밥그릇 지키기’에 급급했던 모습에 실망한 국민 마음엔 대학에 대한 기대, 희망이 이미 사라졌을지 모른단 얘기다.
앨런 가버 하버드대 총장은 교내 구성원과의 비공식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버드를 향한 의회와 대중의 반감에는 일부 진실이 있다. 공감과 겸손으로 공공의 비판에 귀 기울여야 한다”. 권력에 맞서 학교를 지키려면 공공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자기 개혁이 필요하단 판단인 듯하다. 국민으로부터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대학은 살아남기 어렵다. 빈사 상태에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국내 대학들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