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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칼럼] 대학을 바라보는 시각-이건희 회장과 노무현 대통령

중앙일보

2025.06.24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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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이재명 대통령은 이번 대선에서 서울대를 10개 만들고, 지역대학을 획기적으로 육성하겠다고 약속했다. 참신한 아이디어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인 대학정책 수립에 참고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2000년대 초 한국의 경제 지도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정치 지도자 노무현 대통령이 보여준 대학에 대한 시각을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2002년 7월 서울대 총장에 취임한 후 며칠 안 지나 삼성그룹 회장실에서 부부 동반 만찬 제의가 왔다. 전혀 예상 못 한 일이었다. 우리 부부는 당시 이건희 회장 부부와 일면식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1990년대 내내 재벌 개혁을 주장해왔고, 특히 삼성의 자동차 산업 진출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대학 경쟁력 위해 거액 지원 이 회장
서울대 없애 평준화 시도 노 대통령
대학 경쟁력은 국가 경쟁력을 좌우
더 많이 투자하되 폭넓은 자율 필요

이 회장은 대화 도중 대학 발전이 곧 국가 발전이라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고, 내가 앞으로 서울대를 어떻게 이끌 계획인지 궁금해했다. 나는 소수정예화(입학 정원 감축), 다양성을 통한 창의성 제고(지역균형 선발), 기초학문 강화(기초교육원 설립), 호연지기 배양(신입생 세미나 코스 개발), 국내외 학문 개방(세계 일류 대학과 적극 교류) 등을 통해 서울대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학생들을 ‘용지불갈(用之不竭·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음)’한 인재로 키우겠다고 답했다.

이에 이 회장은 “그렇게 많은 일을 하려면 자금이 필요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나는 물론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아무리 좋은 계획도 재정 없이는 실행 불가능하다며 삼성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였다. 아울러 이 지원이 서울대가 우수 인재를 기업에 공급하는 데 밑거름이 되고 나아가 국가 전체에 이익이 될 것이라 강조했다.

서울대는 내 임기 중 삼성으로부터 커다란 액수의 현금을 용도제한 없이 기부받았다. 이에 더해 숙원사업이던 미술관 건축, 호암교수회관 증·개축 사업 등을 현물로 지원받았다. 현금과 현물을 합하면 총 1000억원에 이르렀다. 그 지원이 없었더라면 교수 봉급 인상, 대학원 장학제도 강화, 250여 가구의 교수아파트 신축, 생명과학부 대폭 지원 등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삼성 측은 이러한 천문학적 지원이 세상에 알려지길 원하지 않았다. 뒤늦게나마 진실로 깊은 감사를 표한다.

한편 2003년 2월에 취임한 노무현 대통령은 처음부터 서울대를 없애려고 했다. 그는 경직된 대학 서열과 과도한 입시 경쟁이 각종 사회 문제의 근원이라고 믿었고, 그 중심에 서울대가 있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대통령에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그는 서울 시내의 한 대학교수를 통해 나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서울대를 물리적으로 해체하진 않되, 첫 번째 방법은 학부를 없애고 대학원 대학으로 전환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세계 유수 대학 중 학부가 없는 경우는 없다며 반대했다.

두 번째 방안은 일단 서울대를 포함한 모든 국립대학에 번호를 부여하고, 학생이 무작위로 번호를 선택해 대학에 들어가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명백히 고교평준화를 연장한 대학 평준화 방안이자, 대학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말살하는 길이었다.

내가 서울대 폐지 시도를 거부하자, 노 대통령의 압박이 시작됐다. 작은 예 하나만 소개한다. 황우석 교수의 ‘사이언스’ 조작이 드러나기 전, 청와대는 논문 공동저자들을 초청해 오찬을 열었다. 서울대 총장인 나도 당연히 초청받았다. 그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나에게 “총장님은 오늘 여기 왜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 당황한 나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곁에 있던 교수가 무언가를 메모해 건네자, 그는 “아까 말은 농담이었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제 대답도 농담이었습니다’라고 응수했다. 노 대통령의 독특한 화법을 감안하더라도 참기 어려운 수모였다.

노무현 정부 내내 대학입시 제도를 두고 서울대와 청와대의 입장차는 계속되었다. 2005년, 서울대는 2008년부터 통합교과형 논술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이에 분노한 노 대통령은 김진표 교육부총리를 청와대로 불러 “서울대 총장 옷을 벗겨야겠어요. 사표를 받아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죠?”라고 물었다. 김 부총리는 “논술 강화는 내신과 수능의 변별력 부족을 보완하려는 조치인데, 이것으로 서울대 총장을 물러나게 하면 해외토픽감”이라며 반대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대학이란 무엇인가? 대학은 기존 지식을 전달하고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곳이다. 그래서 대학경쟁력은 국가경쟁력을 좌우한다. 한편 대학은 투자를 토양으로 자율을 공기로 발전하는 유기체다. 현재 한국의 대학은 더 많은 투자, 그리고 더 폭넓은 자율에 목말라한다. 나는 이재명 정부가 대학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또 충분한 자율을 허용할 것을 권고한다. 그렇게 하면 지식의 전달을 넘어 지식을 창출하려고 애쓰는 대학에 반가운 단비가 될 것이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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