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천안에 거주 중인 백인천 전 LG 트윈스 감독을 찾아뵈었다. 백 감독은 최근 허리 협착증과 극심한 두통으로 5분 이상 앉아 계시는 것도 힘들다. 최근 다니던 교회 출석도 중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보다 더욱 염려가 됐다.
카카오톡으로 자주 안부를 나누고는 있지만, 건강 상태를 직접 확인하고픈 마음에 기별을 드렸다. 이날 방문에는 OSEN의 홍윤표 선임기자, 전 대한야구협회 윤정현 전무, 차명석 LG 단장과 함께할 예정이었으나 일정이 맞지 않아 홍 기자는 다음 기회로 미뤘고, 세 사람만 다녀오게 되었다. 방문 길에선 차 단장이 미리 준비한 선물도 전달해드렸다.
애초에는 30여 분간 자리하고 안부를 확인한 다음 바로 상경할 예정이었으나, 오랜만의 만남이어서인지 대화는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두 시간 넘게 이어졌고, 우리는 아쉬움 속에 작별 인사를 나눴다.
사실 백 감독과 나는 선수 시절 큰 인연은 없었다. 그러나 한 시대의 상징과도 같았던 백 감독의 일본 무대 활약상은 야구팬이 아니라도 누구나 알고 있을 만큼 매스컴을 통해 널리 알려졌고, 나 또한 오래전부터 그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1970년, 선수로서 마지막 시즌을 보낸 나는 국제그룹 계열사인 국제상사에서 프로스펙스 영업부장으로 일하다가 그룹 해체로 인해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그 후 KBS 스포츠 중계부장 박홍수 PD의 권유로 야구 해설위원으로 방송에 입문했고, 억센 경상도 사투리와 허스키 한 목소리, 그리고 15년 만에 돌아온 마운드의 감각을 되살려 야구계에 복귀했다.
KBS 라디오를 시작으로 MBC에서 15년, 이어 SBS에서 3년 등 30여 년간 마이크 앞에 섰고, SBS 시절에는 백 감독과 함께 방송하게 된 것을 계기로 비로소 깊은 유대를 쌓게 되었다.
MBC 재직 당시엔 상업은행 시절 후배인 허구연 위원(현 KBO 총재)과 함께 해설했고, 당대 최고의 분석가 하일성(작고)과 보이지 않는 경쟁도 치열했다.
두 사람 모두 야수 출신이었기에, 나는 유일한 투수 출신(부산고-상업은행) 해설위원으로서 차별화를 꾀했고, 특히 백 감독과는 빈번한 대화를 통해 ‘어떻게 일본에서 최고 타자로 자리매김했는가’에 대한 그분의 철학과 정신에 감탄하게 되었다.
[사진]OSEN DB.
아마도, 내가 백 감독의 인간적인 면모에 매료되었던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우정이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1997년 6월 29일,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었던 백 감독은 경기 후 귀가 도중 뇌경색으로 쓰러져 전신 마비를 겪었다. 서울 삼성병원에 입원해 3주간 치료를 받았고, 8월 1일 기적처럼 복귀했으나 시즌 종료 후 삼성과의 인연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후에도 끊임없는 재활과 정신력으로 몸 상태를 회복했고, 2002년 여름,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직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
당시 롯데는 16연패라는 최악의 상황 속에 빠져 있었고, 구단으로선 특단의 조치가 절실한 시점이었다. 백 감독은 A4용지 세 장 분량의 유인물을 선수단 앞에 배포했다. 그 안에는 “프로야구 선수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과 일본 프로야구 일류 선수들의 삶, 그리고 자신이 겪은 20년의 경험담이 빼곡히 담겨있었다.
“3년 동안 매일 1,000번 이상 배트를 휘두르면 반드시 일류 선수가 된다.” 그것은 단순한 기술적 조언이 아니라, 모든 한계를 극복하는 ‘정신의 무장’을 요구하는 메시지였다. 백 감독은 선수들의 정신력을 강조했다. 스스로 사랑하고 고된 훈련조차 사랑해야 진정한 프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백 감독의 자서전(『백인천의 노력자애』)에서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그 정신을 살펴볼 수 있다.
“김소식 전 야구협회 부회장은 나를 이렇게 평가했다. ‘백 감독은 바둑의 명인 조치훈과 닮았다. 모든 승부에서 목숨을 거는 사람이다.’ 이 평가는 과분했지만, 나는 ‘목숨을 걸고 야구를 했다’는 점에 있어선 분명히 동의한다.”
백인천 감독은 단지 위대한 기록을 남긴 선수를 넘어, 프로야구에 ‘정신력’이라는 본질을 심어준 사람이다.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 당시 MBC 청룡 초대 감독 겸 선수로 팀을 진두지휘하며 세운 한 시즌 최고타율 4할(.412)의 기록은 오늘날까지도 깨지지 않는 ‘불멸의 전설’이다.
그의 좌우명은 자서전에 이렇게 적혀 있다. “스스로 노력하는 일을 사랑해야 고된 고통을 이겨내어 성공할 수 있다.” 이 말 한 줄에, 백인천이라는 한 인간의 전부가 응축되어 있다.
지금은 몸이 불편하시지만, 나는 다시 한번 기적이 일어나 백 감독이 염원하는 어린이 야구 발전을 위한 뜻을 이어가시길 진심으로 기도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