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남동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에서 한국 실험 미술의 주역 이강소(82)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지난해 11월 개막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가 지난 4월 폐막한 데 이어 개막한 갤러리 전시다. 타데우스 로팍은 1983년 오스트리아에서 시작해 서울을 비롯해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밀라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지점을 두고 있는 글로벌 갤러리다. 안젤름 키퍼, 게오르그 바젤리츠 등 세계 작가들과 한국 작가 중에선 정희민이 이 갤러리와 함께 일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가 작가의 50년 작업을 전체적으로 조망했다면, 이번 전시는 지난해 이 작가와 계약을 맺은 해외 갤러리가 그를 국제 무대에 소개하는 첫 자리다. 이 전시는 8월 2일 막 내리지만, 그게 끝은 아니다. 타데우스 로팍은 오는 9월 파리 지점에서 그의 전시를 또 연다. 이어 10월엔 타데우스 로팍 주도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도록이 제작된다. 올 한 해가 50년간 예술적 실험을 지속해온 이강소가 세계로 무대를 확장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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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예술 실험
이번 일이 하루아침에 일어난 건 아니다. 국내에선 그는 이미 높은 평가를 받으며 국제 무대에 더 알려져야 할 '한국 대표 거장'으로 늘 손꼽혀왔다. 국내 갤러리 중에선 갤러리현대가 전시 개최와 해외 아트페어 출품을 통해 작가를 알려왔고, 리안갤러리는 2023년 그의 '만들어지는 조각' 전시를 열며 추진력을 더했다. 황규진 타데우스 로팍 서울 디렉터는 "이강소는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며 세계 현대미술 흐름 속에서 독창적이고 선구적인 위치를 확립했다"며 "작가의 폭넓고 깊은 작업 세계를 널리 알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강소의 작업이 주목받는 이유는 우선 동양 철학에 뿌리를 둔 작업 개념이 설치부터 회화, 조각, 비디오 등 다채로운 작업에 잘 녹아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1943년생인 이강소는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1973년 서울 명동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소멸'이란 제목의 이 전시는 선술집 탁자와 테이블을 놓아 관객들이 막걸리를 마시는 퍼포먼스였다. 이 현장의 '흔적'은 사진으로 남아 또 하나의 작품이 됐다.
이어 1975년 제9회 파리비엔날레엔 심문섭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가해 '닭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전시장 홀 가운데 닭을 긴 줄로 묶고, 모이통 주위에 횟가루를 뿌려 놓아 닭이 움직인 '흔적'을 사진과 분필 작업으로 남겼다. 당시 이 작품은 프랑스 국영TV 방송에 나갈 정도로 시선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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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불안정하고 모든 것은 변한다'
'흔적'은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다. 그는 생성과 소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관계를 물으며 존재의 본질을 탐구했다. "확실한 건 없다. 우리가 함께 사물을 하나 보더라도 다 각기 입지도 다르고 경험도 다르지 않나. 우리는 같은 것을 보아도 똑같이 인식할 수 없다." 작가가 늘 하는 말이다.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작품이 다르게 보인다는 생각은 작가의 역할과 한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가 '만들어지는 조각'이라고 부르는 조형 작품은 깎아서 만드는 게 아니라 테라코타 등의 재료를 던지는 행위를 통해 완성한다. 작가의 의도가 개입되는 것을 최소화하고, 대신 재료의 중력과 작업 환경에 따라 다른 형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무게를 둔 것이다.
작품에 대한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태도는 회화에서도 이어진다. 이번 전시엔 198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에 이르는 주요 회화가 모두 보인다. 서예 붓을 사용하며 신체의 움직임을 반영한 회화로, 속도감이 두드러지고 도상이 모두 불분명해 보이는 작업들이다. 작가는 "신체와 붓, 물감, 그리고 캔버스의 상호작용을 통해 '기운생동(氣韻生動)'의 에너지를 화면에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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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와 서예, 구상과 추상 사이
또 주목할 것은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의 절묘한 결합이다. 아크릴 물감으로 작업하지만, 그의 화폭엔 동양 전통 붓질의 기운이 넘친다. 작가는 이를 "바보 서예"라 부른다. 붓질엔 신체의 움직임이 반영돼 있지만, 서예처럼 특정한 뜻을 지닌 글자(기호)와는 거리가 멀다. 일본 미술평론가 미네무라 도시아키는 "이강소의 회화에선 서양 근대회화와 동아시아의 수묵화가 교차하고 있다"며 "형상이 사라진 그의 화면은 자연의 숭고한 에너지를 전달한다"고 말했다.
이번 서울 전시엔 회화, '만들어지는 조각', 석판화와 더불어『삼국지』 제갈공명의 여덟 가지 전술 배치에서 영감을 얻은 설치 작품 '팔진도'가 나왔다. 김혜나 타데우스 로팍 전시팀장은 "오는 9월 파리에서 선보일 작품은 이미 별도로 다 엄선해 놓았다"며 "작가의 1975년 파리 비엔날레 참가 50주년을 기념해 파리에선 특별히 '닭 퍼포먼스'를 재연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기자들에게 말했다."우리가 지금 보고 경험하는 세계가 어쩌면 가상의 현실, 즉 환영일 수 있어요. 장자가 말한 '나비의 꿈'처럼요. 저는 그 세계의 에너지를 드러내고 싶었죠."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앞으로도 할 게 참 많아요. 실험은 평생 하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