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훈련에 무단으로 책을 사용했더라도 저작권 침해가 아니라는 미국 법원 판결이 나왔다. 지난 수년 간 AI 기업의 저작물 무단 활용을 둘러싸고 제기 된 논란과, 여러 건의 소송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24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 연방법원은 앤스로픽이 AI 훈련에 책을 무단으로 사용한 것이 ‘공정 이용’(fair use)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미국 저작권법 상 공정 이용은 저작권자 허락 없이도 저작물을 사용할 수 있는 예외적인 경우를 말한다. 심리를 진행한 윌리엄 알섭 연방 판사는 “AI가 작품을 복제 또는 대체하기 위해 책을 사용했다기 보단 변형적(transformative) 이용으로 작가가 되고 싶은 인간처럼 다른 것을 창조하기 위한 훈련에 사용했다”며 “공정 이용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오픈AI 대항마로 불리는 앤스로픽은 AI 모델 ‘클로드’를 개발한 기업이다. 지난해 미국 작가 3명은 앤스로픽이 클로드 훈련에 자신들의 책을 무단으로 사용했다며 저작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저작권법 전문가인 김윤희 변호사(법무법인 세종)는 “공정 이용은 교육·연구·뉴스 보도 등 특정 경우에 한해 저작물의 자유 이용을 인정하는 제도”라며 “국가마다 인정 범위에 차이가 있는데, 미국은 ‘변형적 이용’ 측면을 중시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번 판결은 책을 활용한 AI 훈련 관련 모든 행위가 공정 이용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법원이 훈련에 사용할 책을 확보할 때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알섭 판사는 앤스로픽이 책 데이터확보 과정에서 700만 권 이상의 책을 인터넷에서 불법(pirated) 다운받은 점은 저작권 침해라고 지적했다. 관련 손해 배상 건은 오는 12월 열리는 재판에서 별도로 다뤄질 예정이다.
업계에선 판례가 확립될 때까지 관련 논란이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수년간 메타·마이크로소프트·오픈AI등 빅테크 기업들은 자사 AI 훈련에 저작물을 허락없이 활용했고, 이에 반발한 창작자들은 여러 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영상, 이미지 분야도 마찬가지다. 지난 12일 디즈니와 유니버설은 자사 영화 캐릭터를 무단으로 썼다며 이미지 생성 AI 기업 ‘미드저니’를 고소했다. 다른 분야에선 저작권법 침해를 인정한 판례도 나왔다. 지난 2월 미국 델라웨어주 연방지방법원은 톰슨 로이터가 법률 AI 검색 엔진을 만든 로스 인텔리전스가 자사 법률 서비스 웨스트로우(Westlaw) 데이터를 동의 없이 AI 학습에 사용했다고 낸 소송에서 저작권법 침해를 인정했다. 공정 이용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국내에서도 AI 훈련을 둘러싼 법적 분쟁이 진행 중이다. 올초 지상파 방송사들은 AI 학습에 기사를 무단으로 활용했다며 네이버를 상대로 저작권 침해 및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4월 한국신문협회는 같은 이유로 네이버를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한 바 있다. 양진영 변호사(법무법인 민후)는 “미국에서 많은 선례가 있었던 변형적 이용은 저작권 침해 여지를 굉장히 좁게 보는 것”이라면서 “국내는 좀더 보수적으로 보는 편이라 미국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고 말했다. “공정 이용의 법리가 국내서 진행 중인 AI 관련 소송에서 적용될지 여부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