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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의 신 영웅전] 김일성의 야망과 좌절

중앙일보

2025.06.25 08:04 2025.06.25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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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75년을 맞으며 ①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왜 하필 그때 그런 비극이 벌어졌을까?” 하는 회한이 많다. 어제 한국전쟁 75주년을 지나며, 왜 하필이면 김일성(사진)은 전쟁을 서둘러 300만 명이 목숨을 잃고 분단을 고착화하는 역사적 실수를 저질렀을까 하는 회한을 지울 수가 없다.

그는 지하에서 이런저런 변명을 할지 모르지만, ‘한 지도자의 오판이 역사에 얼마나 큰 비극을 낳는가?’ 하는 교훈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김일성의 선대는 전주 모악산 밑에서 소작과 산지기로 살았다. 그가 남한에서 전주 김씨로 알려진 것은 이런 연고에 따른 와전이었다. 그의 증조부는 한말에 삶이 어려워 북으로 올라가다가 평양에 정착했는데, 평양의 분위기에 따라 그의 가족도 기독교 신자가 돼 장로도 배출했다.

김일성의 어머니는 성인 베드로의 상징을 따서 ‘(강)반석(盤石)’이라 지었다. 김일성도 주일학교와 예배에 열심히 참석했고, 미성을 타고난 덕분에 성가대에서도 활동했으며, 준수한 용모로 인기도 높았다. 김일성의 가족은 빈곤으로 다시 만주로 떠났는데, 감수성 많은 소년은 그 당시 중국을 강타하던 공산주의에 젖어 항일 빨치산으로 활약했다.

해방되고 소련군이 북한에서 군정을 실시할 때 소련이 고전적 공산주의자였던 박헌영(朴憲永)을 세우지 않고 김일성을 선택한 것은 그가 러시아 홍군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항일 투쟁 전과도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김일성의 교지(巧智)도 작용했다. 그런 그가 남침을 결심한 데는 미군의 참전을 예상치 못했고, 남한 내 빨치산의 우호적 봉기를 과신했으며, 초전 3일 안에 수원-원주선을 점령하면 남한 정부가 항복하리라고 믿었던 것이 실수였다. 그가 서울을 점령하고 6월 28일 서울 성북국민학교에서 조소앙·김규식·안재홍 등 48명의 정치 거물을 억류하고 ‘항복식’을 거행했을 때 그는 승리에 도취해 있었다.(계속)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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