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됐던 지난 4월 28일. 이 후보는 첫 일정으로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김대중·김영삼 묘역에 이어 이승만·박정희 묘역을 참배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포스코 회장을 지낸 박태준 총리 묘역도 찾아 20여 분간 머물렀다. 가장 긴 시간 참배였다. 이를 두고 민주당은 “예정에 없던 일정으로 이 후보가 현장에서 즉흥 결정했다”고 밝혔다. 취재해보니 이 후보의 결정엔 “이승만·박정희 참배하는 김에 박태준도 하시라”는 김민석 최고위원의 조언이 역할을 했다고 한다.
‘비리 리스크’ 안고 총리 오를 듯
이재명 박태준 참배 끌어내 주목
소신인 친기업·통합 실현이 답
본디 김민석은 김대중 사람이었다. 1996년 국민회의, 2000년 새천년민주당 공천으로 총선에 연속 당선되며 ‘DJ의 황태자’ 소리를 들었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이 김종필과 DJP 연대를 추진하자 김민석은 김대중에게 “김종필만으론 부족하니, 박태준도 데려와야 합니다”고 진언했다. 김대중은 “좋소. 당신이 꼭 연결해 주시오”라고 했다. 당시 김민석은 박태준과 여의도 침례 교회를 같이 다녔다. “여야 안 가리고 젊은 정치인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있던 박태준은 김민석을 가까이했다고 한다. 이런 친분을 바탕으로 김민석은 박태준에게 “김대중을 도와주시라”고 청했다. 박태준은 고민 끝에 “한번 만나보겠다”며 수락했다. 김민석의 보고를 받은 김대중은 일본에서 치러진 한·일 월드컵 축구 예선전 관람 핑계로 방일해 97년 9월 29일 도쿄 제국호텔에서 박태준을 만났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다면 ①박정희 업적 인정하겠다 ②호남 편중 인사 안 하겠다 ③거짓말 안 하겠다”고 약속하고 박태준 영입에 성공한다. 헌정 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끌어낸 DJT 연대 성사에 김민석이 가교를 놓은 셈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박태준 묘소 참배 뒤 “DJP 연합 정권의 옥동자로 아름다운 열매 같은 존재여서 묘소를 둘러봤다”고 했다. ‘박태준’이 민주당에 갖는 의미를 김민석이 미리 설명해 주었기에 이런 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97년 대선에서 박태준을 끌어들인 김민석은 2002년 대선에선 민주당을 탈당해 재벌(정몽준)이 창당한 ‘국민회의 21’로 이적했다. 민주당 운동권 세력 눈에는 ‘철새’요, 친기업 개량주의자에 해당한다. 그래서 ‘김민새’란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김민석은 경제는 기업·성장이 중요하고 정치는 중도통합이 정도란 생각이 강한 인물이다. SNS에 김민석 응원 글을 올리며 지지하는 민주당 인사들도 정성호·이언주 의원 등 운동권 세력과 거리를 둬온 실용주의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만큼 김민석 총리 지명을 두고 터져 나온 비리 의혹이나 논란은 ‘민주당 대 국민의힘의 싸움’ 이전에 ‘민주당(운동권) 대 민주당(실용파)의 파워게임’ 성격이 강하다. 수도권의 한 민주당 의원은 “당내 강경파가 대통령에게 ‘선을 지켜달라. 김민석 재고하라’는 길들이기에 나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선지 때마침 진행 중인 민주당 전당대회 경선판에서 개딸(이재명 열혈 지지층)들이 ‘대통령 지키기’에 결집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이들은 “이재명 (경기)지사가 그냥 싫다”는 7년전 발언 등을 문제삼아 정청래 후보를 ‘왕수박’이라며 맹공하고 있다. 정 후보는 강성 친명이지만 586 출신으로 운동권의 지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이 대통령은 민주당의 전통적 주주들과는 거리가 먼 정치인이다. TK(대구·경북) 출신인 데다 전대협 같은 주류 운동권 활동 경력도 없다. 이런 그가 대통령이 된 만큼 자신만을 확실히 지켜줄 친위세력을 키울 필요가 절실해진 건 자연현상일 것이다. 소속된 계파가 없는 비주류로 충성심이 강하고 실용주의 노선으로 당내 운동권 세력과 대척점에 서 있는 김민석은 그런 점에서 초대 총리 적임자라고 이 대통령은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24·25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김 총리 후보자의 퍼포먼스는 낙제점이었다. 최근 5년간 수입은 5억여원인데 지출은 13억여원으로, 8억여원이 누락된 의혹에 대해 말로만 반박했을 뿐 객관적 자료는 내놓지 못했다. 더 우려되는 건 정부 예산 규모는 물론 국가채무에 대해서도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재판이 연기됐을 뿐 사법 리스크는 시퍼렇게 살아있다. 그러면 총리라도 깨끗해야 하는데 김 후보자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도 이 대통령은 그를 총리로 임명할 게 확실하다. 그렇다면 김 후보자의 갈 길은 분명하다. 소신인 친기업·친성장 노선과 중도통합 탕평책을 이 대통령에게 끊임없이 진언해 실현해냄으로써 ‘비리 백화점 총리’ 리스크를 해소하는 것이다. 독초도 이로운 성분만 골라내 쓰면 약이 되는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