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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훈의 마켓 나우] AI로 무장한 소송금융, 경쟁의 법칙 바꾼다

중앙일보

2025.06.26 08:06 2025.06.26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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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훈 법무법인 혜명 외국 변호사·카이스트 겸직 교수
소송금융(litigation financing)은 금융회사가 소송 비용을 대신 내주고, 소송에서 이기면 배상금의 일부를 받아가는 금융 비즈니스다. 특히 미국에서는 징벌적 배상과 집단소송이 활발해서 배상금 규모가 크다. 큰돈을 노리는 소송이 많아지고, 소송금융 시장도 계속 성장하고 있다.

모든 게임의 법칙을 바꾸는 생성형 AI 때문에 소송금융 시장도 큰 변화를 겪고 있다. AI가 미국의 과거 판례들을 모두 분석한 덕분에, 소송금융 회사들은 어떤 소송에 투자할지 결정하는 시간을 10분의 1로 줄일 수 있었다. 또한 AI는 과거 사례와 법원의 성향을 바탕으로 승소 확률을 예측하고, 합의 시 수익과 판결 시 배상금을 미리 계산해준다.

우리 기업들도 AI로 성장한 미국 소송금융 시장의 영향권으로 흡수되고 있다. 한국 수출기업들을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계속 제기하는 ‘특허괴물’(NPE)들이 소송 비용을 대부분 미국 소송금융 회사에서 지원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허괴물은 제품 개발이나 제조 없이 특허권만을 보유하여, 다른 기업들로부터 라이선스 수익을 올리거나 특허 분쟁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을 말한다.

특허괴물들은 소송금융 덕분에 무제한으로 법률 비용을 쓸 수 있다. 반면 우리 수출기업들은 법률 비용이 부족해서 억울하게 조기 합의를 하는 경우가 많다. 기업 생존이 걸린 특허 소송에서 자금력의 차이가 승부를 가르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소송금융에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소송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법률비용이 현격히 부족한 개인 발명가나 중소기업들이 부당하게 특허 침해를 일삼는 거대 기업을 대상으로 소송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소송비용 자금력 차이로 인해 사법정의가 뒤바뀌는 부조리에 대응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소송금융은 약자에게 소송에 필요한 비용을 제공해서 법원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힘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한다. 이런 측면에서 소송금융은 시장에서 약자인 중소기업의 ‘사법 접근성’을 확대한다. 한마디로 법률 서비스 이용에 대한 접근성을 제고하여 중소기업이 시장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응하는 방안이 된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자까지 전쟁을 살펴보면, ‘실탄’으로 상징되는 전쟁 물자 부족이 패배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업들이 일상적으로 전쟁에 가까운 경쟁을 치르는 시장에서는 소송비용이 실탄이다. 소송비용이 부족한 기업은 사법 접근성 싸움에서 이기기 힘들다. AI로 업그레이드된 소송금융 제도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심재훈 법무법인 혜명 외국 변호사·KAIST 겸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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