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가상현실) 기기를 쓰자 눈앞에 3차원(3D)으로 사람의 몸 내부가 펼쳐졌다. 기기와 연동된 조작기(컨트롤러)를 움직여 뼈대를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봤다. 이후 가슴 부분을 향해 현실에서 한두 발짝 앞으로 걸어나가니, 마치 몸속으로 들어간 듯 가상 공간에서 폐·심장 등 장기들이 생생하게 구현됐다. 폐 안에 있는 기관지, 심장 안에 있는 혈관까지 정밀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의료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메디컬아이피에서 체험한 ‘3D 해부학 솔루션’이다.
서울대병원 1호 사내벤처
디지털 트윈으로 인체 구현
25개 병원 건강검진에 사용
중국 유명병원 납품 성과도
메디컬아이피는 3D 해부학 솔루션 같은 디지털 트윈 기술 기반의 의료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스타트업이다. 박상준(47) 서울대 의대 교수(영상의학교실)가 2015년 9월 설립했다. 디지털 트윈은 현실의 객체나 공간을 디지털로 복제해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예측·시뮬레이션할 수 있게 만드는 기술이다. 박 대표는 제조·항공 분야에서 널리 쓰이는 디지털 트윈 기술을 의료 분야로 가져왔다. 현재 국내 25개 병원에서 메디컬아이피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고, 엔비디아와 헬스케어 AI 위원회를 꾸려 협업하는 등 활동 영역을 국내외로 넓혀가고 있다. 이날 회사 사옥에서 만난 박 대표는 “예측 가능성과 정밀성이 가장 중요한 의료 분야만큼 디지털 트윈이 절실한 분야도 없다”고 말했다.
인체를 3D 모델로 정밀 재현·분석
Q : 창업을 결심하게 된 배경은.
A :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의료기기혁신센터 부센터장을 지내고, 연구자(교수)로 재직하면서 인체 내부를 볼 수 있는 의료 영상의 잠재력에 매료됐다. 동시에 한계도 느꼈다. 연구는 논문으로 끝나고, 기술은 환자에 다가가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폐암으로 투병하셨는데 그때 환자와 의료진 사이 정보 격차를 절실히 느꼈다. 기술이 단순한 진단 도구를 넘어 삶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던 중 2015년 서울대병원 1호 사내 벤처로 관련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Q : 회사 경영과 의대 교수를 병행하는 데 어려움은 없나.
A : “아무래도 회사 경영과 교육에 병원까지 세 분야를 다 하는 것이 무리여서 5년 전 병원은 사직했다. 그럼에도 의대 교육을 놓지 않는 것은 기술 개발과 학생 교육 두 분야가 상호작용을 통해 보완 및 시너지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 우리 개발 기술이 해부학 등 교육과도 연관이 있어서, 현장에서 오히려 배우는 부분도 많다.”
Q : 디지털 트윈을 활용할 생각은 어떻게 했나.
A : “초기에는 2차원 의료 영상을 3차원으로 재구성하는 기술에 집중했다. 단순히 구조를 재현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환자의 몸을 시·공간을 넘어 정밀하게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고민에서 디지털 트윈이라는 개념에 주목하게 됐다. 기존 제조업에서 항공기·자동차를 디지털로 시뮬레이션하듯이 환자의 X-ray(엑스레이)·CT·MRI를 3D 인체 모델로 정밀 재현·분석하면 질병 예측이나 수술 시뮬레이션, 환자 맞춤형 치료 설계까지 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보수적인 의료 분야의 벽을 넘어
Q : 어떤 제품을 만드나.
A : “크게 2가지 제품군이 있다. 하나는 흑백으로 접하던 7000개의 인체 장기들을 컬러화하는 AI 엔진 ‘메딥(MEDIP) 프로’다. 자동차 부품은 국제 규격이 있지만, 인체 장기는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다. 딥러닝(대량 데이터를 바탕으로 스스로 패턴을 찾아내고 학습하는 머신러닝의 한 분야)으로 AI에 남녀, 태아 등 수많은 인간의 장기를 학습시켜 디지털 트윈으로 구현했다. 또 하나는 ‘딥캐치’인데, X-ray·CT로 찍은 인체 정보를 3D로 생성해 시각화하고 대동맥류·심비대증·폐질환 등 질병 위험도를 신속하게 스크리닝하는 AI 서비스다.”
Q : 신기술로 의료 분야에서 사업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A : “의료 산업의 보수적인 분위기가 가장 큰 허들이었다. 생명을 다루기 때문에 신기술 도입까지 수많은 검증과 신뢰 확보가 필요하다. 초기에는 디지털 트윈에 대해 ‘3D 시뮬레이션은 게임 아니냐’는 시선도 있었다. 그래서 현장에서 실제 체감할 수 있는 경험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수술 시뮬레이션, 디지털 해부, 질병 예측에 이르기까지 수치화된 정밀화 정보를 시각화해서 보여주고 디지털 환자 데이터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Q : 실제 현장에서는 어떻게 쓰이나.
A : “딥캐치는 현재 양산부산대병원, 인천세종병원, 한신메디피아 등 25개 병원에서 건강 검진에 사용하고 있다. 올해 말까지 50군데로 늘리는 것이 목표다. 부산 롯데자이언츠, 수원 KT위즈 등 야구팀에서도 선수 관리를 위해 딥캐치를 도입했다. 근육 불균형, 뼈의 강도 등 선수단의 몸 상태를 분석하고 훈련과 회복관리 및 부상예방에 활용한다. 메딥 프로는 해부학을 위한 ‘메딥 박스’, 신장에 특화한 ‘유로팬텀’ 등으로 나뉘어 있다. 아프리카 에스와티니 의과대학 등 학계에서는 메딥 박스로 사체 없이도 정밀한 해부학 수업을 하고 있다. 유로팬텀의 경우 병원에서 수술 계획을 세우고 모의 수술을 하는 데 활용된다.”
인프라 없이도 치료·교육 가능한 세상
Q : 국내와 해외 사업 비중은 어떻게 가져가고 있나.
A : “내년쯤 코스닥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국내 시장에 주력하고 있다. 다만, 해외 시장 개척도 병행하고 있다. 국내 의료 시장에서 디지털 트윈은 아직 정체기지만 글로벌 시장에서는 연평균 30% 이상 성장률을 보이기 때문이다. 2023년 딥캐치가 미국 FDA(식품의약국) 인증을 획득한 것을 계기로 중동(UAE)·중국·동남아시아 등의 병원 및 정부 기관과 협력 논의를 시작했다. 지난 4월에는 중국 최고 병원인 PUMC(북경협화의학원)에 딥캐치를 납품하는 성과도 거뒀다. 한국 회사로서는 최초다. 또 4년 전부터 엔비디아와 협업하고 있다. 우리 회사 대표 상품인 메딥 프로를 엔비디아의 개방형 플랫폼 옴니버스와 연동해 CT·MRI 데이터를 실시간 3D 디지털 트윈으로 구현하는 작업이다. 이를 바탕으로 AI 기반으로 가상 수술 시뮬레이션, 혈류 및 생체역학 분석 등 확장된 기능을 제공한다.”
Q : 장기적인 회사의 방향성은.
A : “메디컬아이피의 미션은 기술로 인류 건강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것이다. 기술을 통해 일반 대중에 의료 정보 접근성을 높이고 의료 혜택의 격차를 줄여 의료 형평성을 실현하는 것이 핵심 가치다. 예를 들어, 의료 인프라가 부족한 나라에서 사체 없이도 해부학 교육이 가능하고 고가 영상장비 없이도 심각한 질환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김법민 범부처전주기의료기기 연구개발사업단 단장
창업이란 기술 자체보다도 그 기술이 어떻게 사람의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에서 시작되는 여정이다. 박상준 대표와 메디컬아이피는 인공지능과 디지털 트윈이라는 최첨단 기술을 통해 의료의 지평을 넓히고, 실제 생명을 살리는 혁신을 이뤄왔다. 이들의 창업 여정이 한국형 딥테크 창업의 소중한 본보기로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란다.
백승민 어니스트벤처스 대표
메디컬아이피는 첨단 기술의 상용화 가능성과 글로벌 시장 확장성을 동시에 입증한 보기 드문 헬스테크 기업이다. 박상준 대표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사업화에 성공한 창업가로, 의료 현장의 문제를 이해하고 이를 기술로 해결해내는 실행력을 갖추고 있다. 시장성과 임팩트를 동시에 추구하는 딥테크 창업의 모범 사례로서 앞으로의 성장도 기대된다.
◆‘혁신창업의 길’에서 소개하는 스타트업은 ‘혁신창업 대한민국(SNK) 포럼’의 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정합니다. SNK포럼은 중앙일보·서울대·KAIST를 중심으로, 혁신 딥테크(deep-tech) 창업 생태계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단체입니다. 대한민국이 ‘R&D 패러독스’를 극복하고, 퍼스트 무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R&D)에 기반한 기술사업화(창업 또는 기술 이전)가 활성화돼야 한다는 취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