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뜸했던 노 정치인이 미디어를 장식한 것은 골프 때문이다. 95세 나이에 이글과 70타를 기록했다는 소식은 장안의 화제가 됐다. 권노갑 김대중재단 이사장이다. 그가 지난 24일 경기도의 한 골프장의 15번 홀(파4)의 125야드 거리에서 친 두 번째 샷이 홀컵으로 빨려들어갔다. 이글이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동교동계의 맏형, 그리고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와 함께 ‘투갑스’로 불리며 김대중 정부의 실세로 평가받았던 그는 지난 4월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꼿꼿한 자세였다. 26일 국회 헌정회에서 권 이사장을 만나보니 전해진 이야기들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사진기자의 요청에 주저 없이 야외로 나간 권 이사장은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다양한 스윙을 소화했다. 권 이사장은 “매일 1시간씩 자전거를 타고, 아령도 200회씩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장수와 건강 비결로 출발한 대화는 결국 그가 평생 해온 정치와 인연들로 귀착됐다.
캐디 원포인트 레슨으로 실력 수직상승
Q : 원래 골프를 잘 치나.
A : “평소 80~90타를 치고 종전 기록은 82타였다. 이날은 놀랄 만큼 잘 맞더라. 골프는 60세가 넘어서 배웠는데, 30년 동안 100타 언저리였다가 아흔이 넘으면서 실력이 크게 늘었다. 캐디한테 원포인트 레슨을 받고 나서 눈이 뜨였다.”
Q : 생각보다는 골프를 늦게 시작했다.
A : “모두 김대중 전 대통령 때문이다. 그분은 국회의원이 된 뒤엔 공부밖에 몰랐다. 골프나 바둑보다는 공부하는 사람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나도 골프를 안 쳤는데, (DJ가) 1992년 대선 패배 후 정계 은퇴를 하시고 영국에 가서 처음 골프채를 잡으시더라. 나도 같이 쳐야 하니까 그때 배우게 됐다. 사흘간 레슨을 받으니 바로 필드로 나갈 수 있더라.”
Q : 원래 운동을 잘했나.
A : “학창 시절에 권투·유도·농구·야구 등을 했는데, 중3 때 시작한 권투는 1948년 제1회 호남선수권 대회에서 챔피언이 됐을 정도였다. 그때 호남에선 내 상대가 없었다. 김 전 대통령이 1963년 국회의원이 됐을 때도 내가 ‘형님-동생 사이에 어떻게 비서관을 합니까’ 하고 나와서는 대한권투협회에 들어가서 프로모터 등을 했다.”
Q : 건강 비결이 궁금하다.
A : “잘 먹는다. 특히 흑염소 고기를 매일 먹는다. 식당에서 일주일 치를 사서 냉면에도 넣고 블루베리랑 갈아서도 먹는다. 그리고 집과 헬스장에서 매일 2시간씩 운동을 한다. 1시간은 자전거를 탄다. 그래서 내 하체가 아주 쇳덩어리다. 나머지 1시간은 아령·역기 등을 200개씩 하는데, 덕분에 근육이 이렇게 생긴다. 골프는 어깨와 허리로 하는 운동이다.”
Q : ‘혐연가(嫌煙家)’로도 유명하다.
A : “담배를 안 한 건 권투 때문이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은 턱을 맞으면 바로 나가떨어진다.”
권 이사장은 동교동계 중 DJ와의 인연이 가장 오래됐다. 목포여고 영어 교사던 1961년, DJ의 민의원(강원 인제) 당선을 도우면서 정치에 발을 디뎠다. 그는 그로부터 50년 뒤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지금은 한국외대에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주제는 DJ의 정치사상이다.
Q : DJ를 도운 이유는 뭔가.
A : “목포상고 선배였다. 일본인·조선인 학생 90명이 다닌 학교였는데 늘 1등을 할 정도로 대단히 뛰어난 분이었다. 그런데 선거만 나가면 번번이 떨어지는 거다. 그래서 네 번째 나갈 때는 좀 도와드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1961년 5월 13일 인제에서 당선됐는데 3일 만에 5·16이 터져서 국회는 가보지도 못하고 바로 서대문 형무소로 가시더라. 이후 1963년 총선에서는 또 인제로 나가는 걸 고민하시길래 내가 목포로 가시라고 해서 결국 목포에서 당선됐다.”
Q : 함께 힘든 일을 많이 겪었다.
A : “박정희 정권 때가 아주 힘들었다. 1972년에는 중앙정보부에 가서 몽둥이찜과 물고문을 3일 내내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을 배신하라는 유혹도 많았다. 그때 돈으로 아파트 몇 채 가격인 3000만원 주겠다, 미국 유학을 보내준다, 포항제철 이사를 시켜준다… 전두환 정부 때는 남영동에서 또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래도 그분이 대통령이 되는 게 꿈이었으니 끝까지 지켰다.”
Q : 정치에 뛰어든 걸 후회한 적은 없나.
A : “정치를 안 했으면 잘 돼봐야 교장 아닌가. 김 전 대통령 모셨고 이렇게 건강하고 많이 알려졌으니 잘한 것 같다.”
Q : 가족들은 어땠나.
A : “다행히 아내가 참 훌륭한 여자다. 이희호 여사님이 소개해줬는데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경기여고(44회)-이화여대를 나와 미국 뉴욕의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공부했다. 당시 드문 엘리트였는데 나 같은 사람이랑 결혼해 참 고생을 많이 했다. 사실 집사람은 내 청혼을 거절했다. 3가지가 싫었다고 한다. 전라도라서, 서울대 아닌 동국대라서, 그럴듯한 직업이 아닌 국회의원 비서관이라서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한다. 아내 친구들의 남편이 이회창·이수성·고건 전 국무총리, 이종찬 전 국정원장, 장재식 전 의원, 임동원 전 통일원 장관이다. 그러니 내가 눈에 찼겠나. 심지어 나는 그때 서른아홉이었다.”
Q : 그런데 어떻게 결혼했나
A : “장인이 설득했다. ‘김대중은 크게 될 인물이니, 그 밑에 있는 사람도 잘 될 거다’라고 해서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장인은 우리가 고생하는 것만 보다가 돌아가셨다. 처음 당선됐을 때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장인 묘소를 찾아갔다.”
DJ는 1997년 대선에서 당선됐다. 당시 그는 한보그룹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수감 중이었다.
Q : 한보 사태에 연루됐다.
A : “1993년 어느 날 대학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동국대 출신 중 야당엔 너밖에 없다. DJ(김대중)도 정계 은퇴를 했으니 앞으로 할 일이 많지 않겠냐’고 말문을 열더니 정태수 한보 회장을 소개해줬다. 그리고는 최고위원 선거에 쓰라고 5000만원을 줬다. 내 정치 인생이 거기서 한 번 잘못됐고, 감옥에 갔다. 대선 때는 신병 치료 때문에 서울 강북삼성병원에 있었다. 병상에서 김 전 대통령이 동교동 자택에서 청와대로 이동하는 걸 보고 있는데 ‘내가 왜 저기에 없는 건가’라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DJ에 용서 배워…정동영과도 잘 지낸다 1998년 광복절 사면으로 출소한 그는 2000년 새천년민주당 지명직 최고위원이 되면서 정계 복귀했다. DJ 정부의 ‘실세’였지만, 영광의 순간은 짧았다.
Q : 2001년 정동영 의원 등이 주도한 정풍운동에 밀려 결국 사퇴했다.
A : “정 의원은 내가 공천했다. 게다가 바른정치모임을 만든다고 해서 내가 처음에 자금 지원을 했고 이후에도 1년 6개월간 매달 후원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제2의 김현철’이라며 공격하더라. 그 바람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DJ의) 노벨상 시상식을 못 갔다. 김 전 대통령이 나보고 ‘당신은 수습해야 하니 남으라’고 하더라. 이미 짐도 다 싸고, 턱시도랑 예복도 만들어 놓았는데….(웃음)”
Q : 정 의원과 관계는.
A : “지금은 잘 지낸다. 이번에 (통일부) 장관 지명되고도 전화가 왔다. 김 전 대통령한테 배운 것 중 하나가 용서하는 것이다. 그분이 대통령 당선된 뒤 얼마 후 부르시더니 ‘자네하고 나하고 박정희 대통령한테 박해를 가장 많이 받았지만 국민 통합을 하려면 모두 용서하고 기념사업회를 만들어야 할 것 같네. 내가 현직 대통령으로서 명예 이사장을 할 테니 자네가 박근혜씨와 부이사장을 맡아주게’라고 하시더라. 정치가 그런 거다. 한때 원수 같이 싸웠어도 국민과 나라를 위해서 다 훌훌 털고 협력해야 한다.”
Q : 동교동·상도동 멤버들과 만남도 지속하나
A : “물론이다. 모두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동지들이지 않나. 관련 행사 등등 해서 가끔 만나서 식사한다.
Q : 지금 논문 쓰는데 원래 공부를 좋아했나.
A : “기억력은 좋은데 공부머리는 아니다. 대학 시험 때 군자(君子)를 ‘왕의 아들’이라고 썼을 정도로 공부를 잘 못했다. 다만, 일단 시작하면 끈질기고 포기를 안 한다. 박사 학위도 그렇게 오게 됐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하지만 영향력은 적잖아 보였다. 내년 지방선거에 출마하려는 정치인들이 이날도 권 이사장과 면담하고자 대기 중이었다. 인터뷰 도중 민주당 최고위원의 전화를 받기도 했다.
Q : 김민석 총리 후보자 관련 논란이 있다.
A : “2002년 민주당을 나와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를 도운 이후 어려운 시간을 오래 겪었는데, 원래 정치인은 순탄하게만 가면 좋은 시간이 오지 않는다. 거대하게 요동치는 과정을 거쳐 쓴맛 단맛 다 겪어봐야 그의 정치가 올바른 방향으로 잡힌다. 그러니 총리 되면 잘 할 것이다.”
Q : 이재명 대통령이 네 번째 민주당 정부를 열었다.
A : “내가 볼 때 이 대통령은 ‘무에서 유를 만든 사람’이다. 중·고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큰 뜻을 품고 남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해낸 거다. 역경의 세월을 이겨낸 사람이기 때문에 이후에도 어떤 고난이 와도 그것을 뚫고 나갈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