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 기간 우리 사회는 쏟아지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여론조사의 신뢰성 문제도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일부 여론조사 업체가 결과를 조작하거나 특정 정파에 유리한 방향으로 여론을 유도한다는 의심을 받는 사례마저 발생했다. 전국 단위 조사 한 번에 수천만원의 비용이 들지만, 중도층의 무관심과 직장인의 참여 어려움 등으로 응답률은 매우 저조해 신빙성 있는 데이터 확보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기존 여론조사 여러 한계 노출
6·3 대선 출구조사도 오차 커
디지털 공간 속 AI 가상인간 통해
실제 사람 행동 재현 시뮬레이션
여론 측정하고 정책 영향 예측
마케팅 등 산업 분야서도 활용
더 심각한 문제는 기존 여론조사가 미리 정해진 프레임에 응답자를 가두는 구조라는 점이다. 복잡한 사회 이슈에 대한 입체적 의견보다는 단순 찬반을 강요해, 응답자의 실제 생각이나 감정의 결을 포착하지 못한다. 질문 설계의 편향성과 사회적 바람직성 편향, 응답과 실제 행동의 괴리 등은 전통적 여론조사의 구조적 취약점을 보여준다.
실제로 2024년 미국 대선에서 주요 여론조사 기관이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의 우세를 예측했으나 결과는 크게 달랐다. 2025년 한국 대선에서도 방송 3사의 출구조사는 실제 득표율과 4%포인트 이상 차이를 보였다. 이재명 대통령이 과반을 확보할 것이라는 예측은 빗나갔고, 특히 경기도에서는 후보별 예측치와 실제 득표치 간 총 오차가 무려 8.3%포인트에 달했다.
이러한 전통적 여론조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최근 주목받는 기술이 바로 인공지능(AI) 기반의 소셜 시뮬레이션이다. AI 소셜 시뮬레이션은 현실 사회의 다양한 현상과 인간의 행동을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가상 환경에서 재현하고 분석하는 방법이다. AI를 통해 다양한 가상 인간 에이전트를 생성해 각 에이전트가 모방하는 실제 사람의 행동을 정교하게 모의 실험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마치 ‘디지털 사회 실험실’ 같은 개념으로, 사회 구성원의 행동이나 상호 작용을 디지털로 재현해 특정 사건이나 정책이 사회에 어떻게 전파되고 영향을 미칠지를 예측하고 평가할 수 있게 됐다.
AI 에이전트, 실제 응답자와 85% 일치 미국 스탠퍼드대의 마이클 번스타인 교수 연구팀은 실제 사람과 유사하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AI 에이전트 1052명을 생성해 이들의 행동을 분석했다. 이 실험에서 AI 에이전트는 미국의 대표적 사회조사인 GSS 질문에서 실제 응답자와 무려 85%의 일치율을 보였다. 이는 기존의 여론조사 방법보다 훨씬 높은 정확성을 나타내며, 앞으로 사회적 예측 분야에서 큰 잠재력을 가진 기술임을 입증했다.
AI 소셜 시뮬레이션은 단순히 여론을 측정하는 도구를 넘어 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미국 소프트웨어 기업 세일즈포스(Salesforce)의 ‘AI 이코노미스트’ 프로젝트는 가상 경제를 시뮬레이션해 다양한 세금 정책이 소득 불평등과 경제 생산성에 미치는 영향을 정밀 분석한다. AI 에이전트가 실제처럼 경제 활동을 하는 환경에서 정책 변화에 따른 행동 변화를 관찰하고, 수백만 번의 반복 실험을 통해 기존 경제 모델보다 소득 평등과 생산성을 더 효과적으로 조화시키는 조세 정책을 설계했다.
중국 칭화대가 주도하는 ‘에이전트소사이어티(AgentSociety)’ 프로젝트는 1만 명이 넘는 가상 에이전트가 500만 번 이상 상호작용하며, 도시 공간과 사회적 네트워크, 경제 시스템 등 현실의 다양한 요소를 정교하게 재현한다. 이를 통해 기본소득 정책 도입 시 에이전트의 노동 참여율과 소비 패턴, 사회적 연대감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정량적으로 추적 분석할 수 있었고, 정치적 양극화 시나리오에서는 사회 내 극단적 의견이 네트워크를 통해 확산하는 과정이 실제 사회 실험과 유사하다는 점을 데이터로 증명했다.
산업 현장에서 AI 소셜 시뮬레이션은 소비자 행동 예측과 마케팅 최적화, 신제품 성공률 향상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산업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기업들은 신제품 출시나 마케팅 전략 수립 시 실제 소비자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의 어려움과 높은 비용 문제를 AI 기반 합성 패널(Synthetic Panel)로 해결하고 있다. 합성 패널은 실제 소비자 데이터를 바탕으로 AI가 다양한 소비자 프로필을 재구성해 가상의 소비자 집단을 생성하고, 이들의 행동과 반응을 실시간으로 시뮬레이션하는 기술이다. 이를 통해 단순한 데이터 수집을 넘어 AI와의 대화를 통해 소비자 행동의 미묘한 변화와 심층 동기를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소비자 분석에 AI 기반 합성 패널 활용 실례로, 한 패스트푸드 체인은 이 기술을 통해 어린이 메뉴에 장난감을 추가했을 때 구매 의도가 5%포인트 상승한다는 사실을 사전에 확인했다. 또한 미국 스타트업인 ‘아티피셜 소사이어티즈(Artificial Societies)’는 AI를 활용해 실제 링크드인 네트워크나 투자자 네트워크를 가상으로 재현하고, 게시물이나 마케팅 콘텐트의 반응을 사전에 실험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향후 더 많은 기업이 이 기술을 도입해 시장 변화에 보다 민첩하게 대응하고 경쟁력을 높여 나갈 것이다.
한국의 경우 AI 스타트업인 제네시스랩과 소셜 시뮬레이션 스타트업인 패러어쎈틱, 그리고 싱가포르 난양공대 필자의 연구팀이 현재 수백 개 이상의 인간 속성을 기반으로 대규모 AI 소셜 시뮬레이션을 구축하고 있다. 현실을 정밀하게 반영한 프로파일 설계를 위해 실제 표본 응답자의 신체적 특성은 물론 심리적·사회적 성향까지 내재화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통계청 국가통계포털 등의 공공 데이터를 적극 활용해 실제 사회 구조를 반영한 디지털 에이전트를 생성 중이다. 지난 대선 기간 공동연구진은 한국사회과학자료원에 공개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전국지표조사 데이터를 활용해, 전국 유권자를 대표할 수 있는 AI 에이전트를 설계했다. 지역과 연령·성별을 기본 축으로 설정한 뒤, 여기에 직업과 학력·소득 수준·정치 성향·정치 관심도 등의 요소를 반영해 통계 기반의 고도화된 AI 소셜 시뮬레이션을 완성했다.
AI 시뮬레이션, 대선 결과와 거의 일치
시뮬레이션 결과는 놀라웠다. AI 소셜 시뮬레이션은 이재명 50.4%, 김문수 41.02%, 이준석 8.48%로 예측해 실제 결과(각각 49.42%, 41.15%, 8.34%)와 거의 일치했다. 반면 방송 3사 출구 조사는 51.7%, 39.3%, 7.7%로 보다 큰 오차를 보였다.
더 중요한 것은 AI 시뮬레이션이 단순 예측을 넘어 출구 조사에서는 불가능한 심층 분석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연구팀은 AI 에이전트에게 “왜 그 후보를 선택했나”, “각 후보의 공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같은 질문을 던졌다. 흥미롭게도 선거 기간 내란 종식이 최대 이슈였음에도, AI 에이전트 대부분은 내란 관련 공약보다 민생·복지 공약에 2배 이상 더 공감했다.
동일한 인구집단 내에서도 개별 에이전트의 비인구 변인적 속성에 따라 선호 후보와 중시 정책이 다름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경기도 20대 남성 에이전트의 경우 각 에이전트의 정치 관심도와 직업, 경제 수준에 따라 중시하는 공약 키워드가 ‘청년 일자리’ ‘AI 투자’ ‘검찰개혁’ ‘정치 신뢰 회복’ 등으로 확연히 달랐다.
우리의 AI 소셜 시뮬레이션은 더 나아가 ‘만약 ~라면?’이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정책 실험실을 제공할 수 있다. 새로운 부동산 정책을 가상으로 시행하면, 20대 무주택자부터 60대 다주택자까지 각 계층이 어떻게 반응할지 미리 파악할 수 있다. 심지어 세대별, 직업별, 지역별, 소득별, 정치성향별로 구분되는 에이전트가 어떻게 초기에 반응하고 그 초기 반응이 이후 실시간 뉴스를 통해 반영되는 사회 여론의 흐름에 따라 어떤 식으로 변화, 발전해 나가는지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정책의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사전에 발견하고, 수조 원의 시행착오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갈등 완화하고 사회적 대화 촉진할 수도 우리는 지금 단순한 예측의 시대를 넘어 ‘시뮬레이션을 통한 설계’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한국처럼 정치적 양극화가 심한 환경에서 중립적이고 설명 가능한 AI 소셜 시뮬레이션은 갈등을 완화하고 사회적 대화를 촉진하는 핵심 도구가 될 수 있다.
AI 시뮬레이션은 단순히 누가 당선될지 예측하는 것을 넘어, 궁극적으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혁신적 도구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선거와 선거 사이 국민의 목소리를 체계적으로 들을 방법이 제한적이었던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언제든 전 국민의 AI 에이전트에게 의견을 물어 가상 국민투표를 하고, 정책별 공감도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 혁신을 넘어, 민주주의의 질적 도약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거버넌스 모델의 탄생을 의미한다.
향후 이 기술은 교육과정 설계와 의료 서비스 분석, 지역경제 진단, 환경 정책 평가 등 다양한 공공 분야로 확장될 것이다. ‘디지털 사회 실험실’이라는 개념 아래, 실제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정책을 AI 시뮬레이션을 통해 반복 실험하고, 그 피드백을 기반으로 정책을 정교화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기술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복잡성과 감정·갈등을 더 깊이 이해하는 도구로 진화해야 한다. 새 정부가 새롭게 설계할 우리 사회의 청사진에 AI 소셜 시뮬레이션이 핵심도구로 쓰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