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들과 부들 사이 말씨가 스며있다
속에서 맴돌던 말 갑자기 흔들릴 때
부르르 쏟아진 목소리 발밑에서 밟힌다
물속의 뿌리처럼 표정을 감춰둔 채
아무런 미동 없이 오해가 자라나고
부푸는 너와의 간격 멀어지는 뒷모습
부드럽게 풀어지는 오후의 낯빛들이
늪에서 빠져나와 속말을 털어 내면
바람은 씨 있는 말들 촘촘하게 걸러낸다
◆ 김정서
1964년 전남 장흥 출생. 창원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석사. 전문 상담사, 숲해설가.
차상
당부 김나라
떠나시려거든 내 속에 집 한 채 지어 주세요
밀려드는 파도가 목놓을 방 한 칸
그믐달 끌어안고서 곤히 잠들 방 한 칸
시냇물 소리가 적막을 달래는 집
계절을 전해줄 새들이 깃드는 집
큰비에 무너지지 않을
집을 짓고 떠나세요
차하
유품 정리사 김영애
털고 쓸고 묵은 얼룩 힘주어 문지른다
후미진 곳 눅눅한 어둠 세밀히 닦는다
마지막 토사물까지 흔적 한 점 남김없이
건드릴수록 아려오는 고약한 흔적들
지운듯하면 기어 나오는 직전을 닦는 영상
재빨리 애도를 표하며 락스를 뿌린다
망자가 뒤돌아보며 흐뭇하도록 정성껏
물줄기 거세게 쏘아 고독까지 닦는다
눈으론 흠 하나 없는데 마음은 개운치 않다
이달의 심사평
초록의 그늘이 짙어지는 유월이다. 중앙시조백일장 문을 열심히 두드리며 포기하지 않고 응모하시는 분들과 마찬가지로, 백일장 응모작을 기다리는 일은 설렘과 긴장이 되기도 한다. 응모작 중에 작품을 한 편만 보내신 분이 있고, 시조의 종장처리를 신경 쓰지 않아 어쩔 수없이 내려놓은 작품도 있다. 응모 요령을 잘 숙지하여 작품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응모해주시길 당부한다.
유월 장원에 김정서의 ‘부들의 목소리’를 올린다. “부들”이라는 수생식물을 통해 깊숙이 쌓인 인간관계 갈등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내면의 “목소리”를 표출해내고 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시적 소재를 찾아 잔잔하게 풀어낸 솜씨가 무척 섬세하다. “부들”이 “쏟아”내는 말을 감각적으로 듣고 느끼며 “부들”과 화자가 동일시되는 모습이 보여지기도 한다. 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조근조근 들려주는 방식으로 작품을 안정감 있게 마무리한 점이 돋보였다.
차상에는 김나라의 ‘당부’를 앉힌다. 작품이 군더더기가 없고 간결하다. “밀려드는 파도가 목놓을 방 한 칸”이나 “그믐달 끌어안고서 곤히 잠들 방 한 칸”은 사무치게 애잔한 느낌이 들도록 잘 표현했다. 마음속에 “집 한 채” 들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울까 싶다. “큰비에 무너지지 않을/ 집을 짓고 떠나세요” 둘째 수 종장에서 빛이 발하는 작품이다.
차하엔 김영애의 ‘유품 정리사’를 앉힌다. 무거운 주제라고 볼 수 있는 세 수의 작품이 실감나게 읽힌다. 점점 높아가는 자살률, 고령화, 1인 가족, 고독사 등 사회문제가 갈수록 커져가고 있는 현실이다. 어두운 뒷면을 담은 시조 한 편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다소 거칠고 매끄럽지 못한 면이 보이지만 감정 노동이 힘든 유품 정리사와 고독사를 한 “망자”에 대한 “애도”, 작자 진술이 개입된 부분이 선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백인우·심섭연·이둘임의 작품도 눈여겨보았다.
심사위원 강정숙·이태순(대표집필)
초대시조
마네킹 아파트 이분헌
폼나는 신상으로 선보인 아파트
먼발치 유리벽 안 마네킹의 유혹일 뿐
옥조인 신발끈에 눌려
임대도 가쁜 하루
다달이 적금통장 희망을 쏟아부어도
저금리 살얼음판 겨우겨우 건너는데
키높이 구두를 신고
우쭐대는 저 콧대
◆이분헌
충북 보은 출생. 2006년 시조문학등단, 시조집 『환한 식탁』, 경남시조문학상 수상.
집이란 무엇일까요. 촛불이 켜진 방안에 둥근 밥상이 놓이고 가족들이 둘러앉아 수런수런 저녁을 먹습니다. 하루종일 밖에 나가 일하고 돌아온 식구들이 그날의 피로를 풀며 가족 간의 우애를 쌓던 집이라는 공간이 어쩌다 ‘키높이 구두를 신고 우쭐대는 저 콧대’ 높은 ‘유리벽 안’의 마네킹이 되었을까요.
시인은 ‘폼나는 신상’처럼 느껴지는 아파트를 보며 조여오는 현실에 아득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다달이 적금통장’에 ‘희망을 쏟아부어도’ 치솟기만 하는 금리와 작금의 월급으로는 아파트 한 채가 가당치도 않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폼나는 신상 아파트’는 주거 공간이라는 개념을 넘어 화폐자본주의로서의 욕망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쇼 윈도우 안의 마네킹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 합니다. 저소득층 너희들은 감히 올라설 자리가 아니다 라고 콧대를 높입니다. 어쩌다 그 욕망을 충족했다 해도 더 크고 화려한 마네킹의 유혹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시인의 시적 상상력이 끊임없이 생동하는 이 작품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함의하는 욕망이라는 문제를 심도 있게 구축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논리에 함몰당하는 현대인의 마음을 시인은 적절한 비유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지요. 우리의 생사여탈권을 그들이 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때입니다.
시조시인 손영희
◆ 응모안내
매달 18일까지 중앙 시조 e메일([email protected])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