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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의 행복한 북카페] 상처도, 기억도 아닌 이상한 물질

중앙일보

2025.06.30 08:08 2025.06.30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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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 소설가
테레지아 모라의 소설집 『이상한 물질』을 읽다가 문득 깨닫는다. 이 목소리는 어디서 들어봤는데…. 그럴 리 없다. 작가의 이름도 처음이고, 책도 새로 사서 읽은 것이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기면서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어린아이의 외로운 목소리, 닿지 않은 사랑의 메아리가 시차를 두고 뒤늦게 울려 퍼지는 동굴 같은 방, 이름 붙일 수 없는 갈망이 민들레 솜털처럼 떠다니는 이야기를 나는 알고 있고, 읽어 왔다. 토베 디틀레우센의 『어린 시절』과 아글라야 페터라니의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가 우선 떠오른다. 국적도, 시간대도 제각각 다르지만 이런 소설에는 어딘가 공통적인 ‘발성’이 있다. 문장은 뚝뚝 끊기거나 길고 구불구불하여 흐릿한 인상을 준다. 친밀감이 적고, 소통은 불가능하고, 모든 사람이 혼자인 낯선 장소에 버려진 마음 같은 것이 무의식적으로 감지되는 것이다.

헝가리의 독일 소수민족으로 태어나 이중 언어를 사용하며 자란 작가는 첫 번째 단편집으로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국경을 넘어가려는 사람들, 그걸 이용하는 동네 사람들, 집시와 알코올 중독자와 이방인이 뒤섞인 이 공간에서 각 단편의 주인공은 ‘주변부의 주변부’라고 할 수 있다. ‘이상한 물질’은 닿지 않은 감정이 마음속에 침전물처럼 남아 그 흔적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다 문득, 믿을 수 없이 아름답게 도약한다.

‘우리 목덜미로 비가 내린다. 비는 조용히 오고, 길게 소리도 없이 마치 실처럼 내려온다. 나중에는 내가 집에서 꾸는 꿈처럼 비가 온다. 나는 비가 올 때 걸어간 이 길에 대해 오랫동안 꿈을 꿀 것이다.’

시제가 뒤섞이며 미래에 가서 지금의 이 순간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예지처럼 알게 되는 찰나가 황홀한 감각을 선사한다. 폭력과 방임이 난무하던 어린 시절을 그래도 그리워하는 이유는, 동심이라는 필름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도 함께 찍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성중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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