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오후 2시 20분쯤 부산 강서구 렛츠런파크 부산ㆍ경남 경마장. 평일인데도 수천 인파가 몰린 이곳에선 4경주(1800m)에 나선 경주마 11마리의 레이스가 한창이었다. 이 경기에 걸린 온ㆍ오프라인 마권 판매액은 19억원. 2번마 ‘인디고스트’가 경합 끝에 1분 55초9의 기록으로 피니시 라인을 끊으며 ‘코로 이기는’(경마에서 말 코 하나 정도 간격의 신승을 의미) 승리를 거두자 장내는 크게 들썩였다. 이날 경마장엔 경마팬 2386명이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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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지휘자’로 21년, 전설의 조교사 은퇴
이런 경마엔 ‘보이지 않는 지휘자’가 있다. 한국마사회 주관 자격 시험에 통과한 최고의 말 전문가로 마주에게 말을 위탁받아 대회 출전부터 기수 선정, 경주 전략 수립 등을 총괄하는 조교사다. 한국마사회에 따르면 조교사는 전국에 95명뿐이다.
이 가운데 김영관(65) 조교사는 경마업계 자타공인 ‘신화를 쓴 조교사’로 통한다. 10대 시절 말을 타는 기수(騎手), 이후 마필 관리사를 거쳐 2004년 3월 불혹을 넘긴 나이(44)에 조교사로 데뷔했다.
데뷔는 늦었지만, 20여년간 7045전을 치르며 1539회 우승을 거뒀다. 경마사상 최단기 1000승(2014년 6월)과 첫 1500승(2024년 8월) 달성 모두 김 조교사의 기록이다. 같은 시기 데뷔한 조교사들 중엔 200~300회 우승에 그치는 경우도 많다. 그가 경기에서 타낸 상금 총액은 906억원(조교사 몫 8% 적용 시 72억4800만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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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통馬’ 알아보는 건 기본일 뿐”
30일 정년 퇴임을 맞는 김 조교사를 지난 27일 렛츠런파크 부산ㆍ경남에서 만나 ‘활동 시기 전체를 전성기’로 일군 비결을 물었다. 데뷔 경기에서 다리 저는 말 ‘루나’를 우승으로 이끈 강한 인상 때문에 김 조교사에겐 ‘혈통 좋은 말 보는 눈이 남다르다’는 평가가 늘 뒤따랐다. 장애 탓에 경매에서 번번이 외면받던 루나는 김 조교사의 세심한 보살핌과 조교에 은퇴 때까지 쟁쟁한 준마들을 제치고 13번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와 관련, 김 조교사는 “말의 뼈대와 움직임, 걸음걸이, 유연성 등 좋은 말을 알아볼 수 있는 요건들이 있다”며 “하지만 그걸 모르는 조교사는 없다. 눈에 띄는 좋은 말일수록 더 알아보기 쉽다”고 했다. 요컨대 말의 자질을 알아보는 건 시작에 불과하단 이야기다.
그는 “일본·호주·미국 등 좋은 경마 시스템과 마시장을 갖춘 곳이면 가리지 않고 다녔다. 그들은 말의 습성을 어떻게 파악하고 길들이는지 눈여겨 관찰했다”고 했다.
이어 “말의 습성을 정확히 파악해 (국내 사료보다) 20~30% 비싼 값에 근력ㆍ지구력 등에 좋은 사료를 해외 현지에서 공수했다. 경기 땐 말의 보폭과 실제 발걸음 수를 비교해 발밀림 정도를 계산하고, 결승점에 도착해 머리를 쳐드는지, 앞으로 뻗는지 등 '콧구멍 속까지' 세심히 관찰하며 조교했다”고 했다.
말 위 기수의 역할도 크다. 경마판엔 ‘경주 기여도는 마(馬) 7 인(人) 3’이라는 오랜 금언이 있다. 김 조교사는 “훌륭한 기수는 이걸 ‘마 3 인 7’로 바꿔낸다. 수시로 말을 관찰ㆍ분석하고, 습성을 정확히 파악하려 조교사와 소통한다. 조교사는 중요한 경기 때 그 기수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말이 일찍 전성기를 맞는 조숙형인지, 완숙형인지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며 “일찍부터 제 체질에 맞는 사료를 먹으며 최적의 레이스 자세를 갖춘 말이 전성기에 좋은 기수를 만나면, 혈통 좋은 말도 앞지를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걸 이뤄내는 순간 온몸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도파민이 샘솟는다”고 말하며 그는 천진하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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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우승 뺏어갔다’ 원망, 이젠 이해돼”
퇴임을 목전에 둔 지난 4월에도 그는 뚝섬배 대상경주(큰 타이틀이 걸린 주요 대회)에 ‘즐거운 여정’을 출전시켜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처럼 좋은 성적만을 좇으며 조교사로서 영광을 이뤄온 그의 여정에도 미안하고 후회스러운 기억으로 남은 순간들은 있다.
김 조교사는 “좋은 결과를 많이 냈지만, ‘형님, 남의 우승 상금을 그렇게 많이 뺏어가면 어쩌느냐’는 주변 볼멘소리를 시샘 정도로만 여겼다”며 “하지만 이제 그 말의 뜻을 알겠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 늘 조바심을 내느라 주변을 둘러보거나 잘 챙기지 못했던 것 같다”고 했다.
퇴임을 앞두고 김 조교사가 마방의 좋은 말 43마리를 후배들에게 골고루 인계하기 위해 애쓴 것도, 마방 직원 11명이 계속 일할 수 있게 조건 좋은 자리를 백방으로 알아본 것도 이런 ‘은혜 갚기’의 일환이다.
김 조교사는 “조교사로 산 20여년 누린 영광은 결코 혼자 이룬 게 아니다. 김진우·이주현·안애환·미티키 등 톱니바퀴 같은 호흡으로 말을 돌봐준 마방 식구들에겐 각별한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마사회에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퇴임 이후에라도 우리나라 경마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주어지는 역할을 마다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