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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수의 시선] 끝나지 않은 경기

중앙일보

2025.07.01 08:18 2025.07.01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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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수 스포츠부장
그 해석이 ‘늙을수록’이든 ‘늙어서도’이든 상관없다. 세월을 무색하게 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표현 중 ‘노익장(老益壯)’이 있다. 유래는 『후한서』 ‘마원전’이다. 마원은 후한의 개국공신이다. 훗날 유비가 세운 촉한의 표기장군이 되는 마초가 그의 후손이다. (그러고 보면 충성심만큼은 마씨 가문 내력인가 보다.) 마원의 지론이 “대장부가 뜻을 품었다면, 궁할수록 더욱 굳세고, 늙을수록 더욱 기백 넘쳐야 한다(大丈夫爲志, 窮當益堅, 老當益壯)”였다. 한번은 반란이 일어났다. 62살 마원이 진압에 나서려 하자 황제(광무제)는 많은 나이를 들어 만류했다. 마원은 “아직 갑옷을 입고 말을 탈 수 있으니 늙었다고 할 수 없다”며 출정을 고집했다. 지론의 뒷부분인 ‘노당익장’을 줄인 게 ‘노익장’이다.

꾸준한 활약 40대 최형우·오승환
최선 다하는 뚝심이 노익장 본질
늙어가는 것과 끝났다는 건 달라

지난달 11일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 KIA 타이거즈의 프로야구 광주 경기 7회 말. 삼성의 네 번째 투수 오승환이 등판했다. 그는 KIA 2번 타자 이창진과 3번 타자 오선우를 연거푸 헛스윙 삼진으로 잡았다. 이어 KIA 4번 타자 최형우가 타석에 들어섰다. 두 선수가 누구이며 어떤 사이인가. 2010년대 초 삼성의 4년 연속(2011~14년) 정규시즌 및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 주역이다. 그 시절 4번 타자 최형우가 선봉에 서고, 마무리 투수 오승환이 뒤를 책임졌다. 세월이 흘러 이제 43살 오승환은 KBO리그 최고령 투수, 42살 최형우는 최고령 타자다. 마운드에서 타석까지 18.44m를 떨어져 마주 선 두 선수보다 가까운 쪽으로 포수의 뒷모습도 보였다. 등에 찍힌 이름 석 자, 강민호. 찾아보니 그가 그나마 셋 중 가장 어리다. 40살.

최형우의 ‘노익장’은 실로 놀랍다. 올해 KIA가 치른 79경기 중 76경기에 출전했다. 그의 타격 부문별 순위(6월30일 기준)를 한번 보자. OPS(장타율+출루율) 1위(1.011), WAR(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 2위(3.61), 타율 3위(0.333), 안타 공동 3위(90개), 타점 공동 5위(53개), 홈런 공동 7위(14개) 등이다. 2002년 프로에 데뷔해 올해로 24년 차. 통산 타점(1704개)과 통산 2루타(535개) 부문 역대 1위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조차 상투적으로 들릴 만큼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 5월 그는 월간 최우수선수(MVP)를 수상했다. 40대 수상자는 KBO리그 최초다. 사실 ‘통산’까지 갈 것도 없이 ‘현재’만으로도 최고다. 그는 타석에 서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아직은 할 수 있으니까.” 마원 식으로 돌려 표현한다면 “아직 배트를 휘두르고 뛸 수 있으니 늙었다고 할 수 없다” 쯤일 거다.

오승환은 올해 상반기에 모친상과 허벅지 부상 등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2군에서 실전 감각을 끌어올린 그는 지난달 3일에 1군에 올라왔다. 지난 6월 한 달간 8경기에 등판해 7과 3분의 1이닝을 던졌다. 승·패나 세이브, 홀드 없이 평균자책점 4.91이다. 과거의 그와 비교한다면 초라할 수도 있는 기록이다. 그래도 8경기 중 5경기를 무실점으로 막았다. 엄격히 말하면 위압감도 구속도 예전만 못하다. 그래도 그의 투구는 여전히 의미가 크다. 그는 “목표는 없다. (팀에) 도움이 되고 싶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그가 던지는 공 하나, 그렇게 세운 기록 하나가 KBO리그 역사다.

여전히 강렬한 최형우도, 조금씩 스러지는 오승환도, 오랜 세월 그래왔던 것처럼 2025년에도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여전히 시작과 끝에서 경기를 챙긴다.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뚝심. 그게 ‘노익장’의 본질이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까지 모든 경기에서 빛날 수는 없다. 부상은 자주 찾아오고 회복은 더디며 관중은 냉정하다. “이젠 내려올 때가 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잦아진다. 그럴수록 태도와 존재로 대답한다. 이런 상황이 비단 경기장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두 선수 이야기로부터 시선을 조금만 돌려 본다. 지금 은퇴를 고민하는 누군가의 삶으로 말이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나서는, 나이 든 그들 말이다. 후배에게 그만 자리를 내주고 떠나야 할지를 매일 아침 고민할지 모른다. 최형우는 배팅볼 스윙을 통해, 오승환은 불펜 피칭을 통해 이렇게 알려준다. “늙어간다는 것과 끝났다는 것은 다르다”고. 젊은 시절보다 판단은 정확하고 감정은 단단하며 말은 묵직하다. 인생이 9회 말처럼 보이는가. 최형우처럼 오승환처럼, 아직 끝이 아닐지 모른다. ‘노익장’은 당신과 나의 이야기일 수 있다. 우리의 경기가 거의 끝났다고 누가 단언하는가. 연장전에 접어들지 모를 일 아닌가. 그리고 이어지는 연장전에서 우리가 끝내기 안타를 칠 수도,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잡을 수도.





장혜수([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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