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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의 직격인터뷰] "빅 테크들, 하이에나처럼 우리 산업 데이터 노릴 것"

중앙일보

2025.07.01 08:24 2025.07.01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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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전문가 권석준 교수 인터뷰
지난달 25일 반도체 전문가인 권석준 성균관대 교수를 만났다. 그는 AI 시대 한국이 처한 위기와 여전한 가능성, 그리고 다양한 제안을 1시간 30분 동안 열정적으로 쏟아냈다. 김경록 기자
이재명 정부의 초대 AI 미래기획수석에 '소버린 AI 전도사'로 불리던 하정우 네이버클라우드 AI 혁신센터장이 임명되면서 소버린 AI를 둘러싼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쏟아지고 있다. 업계와 학계에선 새 정부 AI 전략 중심축에 소버린 AI 개발을 두는 게 맞는 방향인지부터가 논쟁 대상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AI 기업 간담회에서 "'챗GPT가 있는데 소버린 AI 개발은 낭비'라고 말하는 건 '베트남에서 쌀 생산을 많이 하는데 우리가 왜 농사짓냐, 사 먹으면 되지'란 얘기와 똑같다"며 "위험한 생각"이라고 정리했다. 하지만 여전히 소버린 AI의 정의부터, 추구해야 할 목표와 방법,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 등에 대해 전문가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일반 국민은 더 혼란스럽다.

그래서 미국·일본·중국 반도체 강자들의 흥망성쇠를 드라마틱하게 다룬『반도체 삼국지』(2022)를 통해 한국 반도체 산업의 활로를 제시했던 권석준 성균관대 화공과 교수가 떠올랐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이 책을 참모들에게 권하며 "반도체가 21세기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구호와 달리 R&D 예산 삭감 등 엉뚱한 정책으로 중요한 3년을 허비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AI 3대 강국'을 내세운 새 정부는 과연 전임 정부와 달리 말 잔치를 넘어 실효성 있는 결말을 낼 수 있을까.
알고리즘 의존은 '디지털 식민지'
산업 경쟁력 위해 소버린 AI 필수
AI시대 핵심은 안정적 전력 공급
'섬나라' 한국, 일본과 연결해야

이런 궁금증을 안고 지난달 25일 권 교수를 만났다. AI 반도체 스타트업을 비롯해 민·관에 두루 자문해온 그는 최근 페이스북에 '대만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은 한국 메모리반도체 산업의 하청업체 전락을 야기하는가?'라는 다소 자극적인 긴 글을 올렸다. 비단 미·중과 격차가 크게 벌어진 AI 분야뿐 아니라 한때 세계 시장을 이끌던 반도체마저 하청업체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할 말이 많을 거 같았다. 실제로 1시간 반 동안 속사포처럼 다양한 제안을 쏟아냈다. 새 정부 AI 인재 전략은 조삼모사식이라고 비판했고, 전력 수급과 관련해선 우리와 주파수가 같은 일본 간사이 지역과 그리드(전력망)를 연결해 에너지 수급 안정성을 높이자는 도발적 제안을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Q : -소버린 AI 논란이 있다.
A : "자꾸 '소버린 AI 필요 없다'는 잘못된 얘기가 나온다. 윈도 같은 운영체제(OS)나 엑셀 같은 소프트웨어에 비유하면서 외국에서 잘 만든 걸 가져다 쓰면 된다고 주장한다. 아니다. 소버린 AI는 국가 운영 체제다. 지켜야 하는 산업, 보호해야 할 국민 개인 정보, 국체(國體)의 모든 게 들어간다. 국체란 한국의 언어·문화·역사·주권 등 국익의 핵심이라 건들지 말아야 하는 레드라인이다. 절대 내줘서는 안 된다. OS나 소프트웨어와 달리, AI는 데이터 생성과 학습을 통해 계속 업데이트한다. 챗GPT 같은 빅 테크 AI 모델(LLM·대형 언어 모델)이 오픈소스로 알고리즘을 공개한다지만 상당수는 암호화해 숨겨 놓는다. 알고리즘 주권이 없으면 남이 만든 알고리즘 필터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초반에 개념 정리를 잘못하면 일종의 각인 효과가 있어서 (사회적 인식을) 바로잡기 어려운데, 업계에서 윈도·엑셀·(한국만 쓰는) 한글 같은 틀린 비유를 너무 많이 한다. "
'소버린 AI 전도사' 하정우 AI미래기획수석이 지난달 19일 대통령실에서 브리핑하는 모습. 연합뉴스
소버린 AI를 바라보는 시각
배경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 연합뉴스
거꾸로 소버린 AI를 현재 강국을 가르는 핵무기 보유 여부와 비교하는 업계 전문가도 많다. 하정우 수석은 과거 "AI가 모든 산업에 영향 주는 기술이다 보니 AI를 앞세워 다른 나라 디지털 영토를 먹어간다. 잘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만들어야 하는 기술"이라고 주장했다. 소버린 AI가 있어야 한국 IT 서비스가 글로벌 기업에 종속되는 걸 막을 수 있다는 얘기다. 또 "GPU(그래픽처리장치) 같은 핵심 자원이나 기술을 (미국이) 전략 자산화하는 상황에서 AI는 안보 어젠다로 다뤄야 한다"고도 했다. LG AI연구원장 출신 배경훈 과기정통부 장관 후보자는 "소버린 AI를 한국어 특화 모델로 정의하고 싶지 않다. 한국 제조 영역에서 잘 하고 있는 바이오 등에 특화된 AI 모델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또 배타적으로 들리는 '소버린'(자주적)이라는 용어 대신 '인클루시브'(포용적) AI를 제안하기도 했다.

Q : -새 정부 소버린 AI 정책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
A : "구체적 정책 면에서 좀 더 스마트해질 필요가 있다. 예산 100조 들여 LLM을 위한 엔비디아 GPU 사 오는 데 전부 써버리면 큰 효용 가치가 없다. 물론 상당 부분 GPU 확보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산업 부문별로 특화된 SLM(소규모 언어 모델)을 만들고, 여기 들어갈 국내 팹리스(공장 없는 설계 전문 반도체 회사) 퓨리오사 AI나 리벨리온의 산업 특화된 AI 반도체(NPU·신경망처리장치)를 키우고, 그 반도체에 특화된 소부장 기업 양성에 투자해 생태계 저변을 확대해야 한다. 인재 확보 전략도 아쉽다. 정부는 3000억원 투자해 박사 후 연구원(포닥)에게 연봉 9000만원을 보장한다는데 효과적일까. IMF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때조차 줄인 적 없는 R&D 예산을 지난 정부가 삭감해 연구자들 사기를 꺾어버렸다. 저출산·의대 쏠림 와중에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연봉 몇 푼을 넘어 연구 환경을 제대로 갖춰 생태계를 조성하지 않으면 핵심 인재가 국내 남기 어렵다. 여기에 공공 역할이 중요하다. 세계 시장 점유율 1%에 불과한 국산 팹리스를 키우려면 미국 아르곤이나 오크릿지 국립연구소처럼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게 어느 정도 사주는 정책이 필요하다. 또 지난 정부의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구상이 제 역할을 하려면 안정적 전력과 용수 공급이 중요한데, 정부 차원에서 규제를 푸는 등 정책을 정비하고 지자체를 설득해야 한다. 기업은 절대 못 한다. "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울산 AI 데이터센터 출범식에 참석해 국산 팹리스 리벨리온의 AI 반도체에 'AI 고속도로, 세계 3대 강국' 메시지를 남겼다. 연합뉴스

Q : -소버린 AI가 정말 실현 가능한가.
A : "적합한 모델을 만들 수 있는 소프트웨어 생태계가 있느냐, 이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하드웨어로 구현할 수 있느냐, 이 둘을 합쳐 '풀 스택'이라고 하는데, 전 세계에 할 수 있는 나라가 딱 셋이다. 미국·중국·한국. 솔직히 2.5개 나라다. 놀랍게도 미국이 0.5다. 숱한 AI 자이언트가 있지만 칩은 자국에서 못 만들지 않나. 미국 내 반도체 공장 독려하면서 2030년대 후반쯤 1까지 가려고 하는데 정말 그렇게 될지는 두고 봐야 한다. "

Q : -한국이 나름 경쟁력 있다는 얘기인가.
A : "맞다. 빅 테크들의 AI 성능 지표를 보면 2022년부터 2024년까지 아주 가파른 우상향을 보이다 2024년 하반기부터 꺾이기 시작했다. 빠른 발전 시기엔 언제 경쟁에 뛰어들어도 따라가기 어렵다. 그런데 이젠 선두 그룹도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한국은 지금 85% 수준은 되니 해볼 만하다. "

Q : -AI의 폭발적 성장기였던 지난 3년을 허비했다.
A : "3년을 놓쳤다고 한탄할 게 아니라 차라리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2022년 말 오픈 AI의 챗GPT가 나오면서 지난 3년간 AI 발전을 지배한 게 반도체업계 '무어의 법칙'과 비슷한 '스케일링 법칙'이다. 일정 주기마다 성능이 덧셈 아닌 곱셈, 즉 지수함수로 발전했다. 무어의 법칙은 한 40년 갔는데, AI는 발전이 너무 빠르다 보니 업계 내부에서 벌써 스케일링 법칙의 정체를 슬슬 걱정한다. 10억 개 파라미터(매개변수·AI 연산 능력 수치화 지표)로도 좋은 성능을 내는데 경쟁 심화로 100억개, 1000억 개, 조 단위까지 갔다. 파라미터 증가를 통한 성능 개선이 언제까지 가능하냐,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들 한다. 이 경쟁 하느라 오픈 AI와 구글 등이 지난 3년 동안 연 수십 조를 쏟아부을 때 한국 정부와 기업이 같이 돈 싸움했다고 승산이 있었을까? 아니다. 돈과 연산 능력 뛰어난 엔비디아나 오픈 AI·구글 등이 갖지 못한 데서 승부를 봐야 한다. 바로 데이터다. "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0일 울산 AI 데이터센터 출범식에서 격려사를 했다. [이재명 대통령 SNS]

Q : -데이터는 우리 약점 아닌가.
A : "모든 기업(제조업)은 결국 AI로 '산업 전환'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산업 데이터는 금맥이다. 빅 테크들은 이제 산업 데이터를 찾아 하이에나처럼 헤매고 다닐 거다. AI 시장이 LLM 위주에서 특정 산업이나 차량·로봇 등 디바이스별로 특화된 SLM으로 점차 이동하고 있다.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지난 5월 대만에서 연구원 1000명 고용해 AI 생태계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는데, 아무도 대만용으로 보지 않는다. 타깃은 중국 제조업체다. 지금 엔비디아는 중국 제철이나 석유화학 등 제조업체를 만나 디지털 트윈(현실 속 공장을 디지털로 복제해 먼저 가동하는 기술) 등 AI 솔루션 제공을 제안하며 이 판을 주도하려 한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올 초 미국과 손잡은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도 이면에는 '산업 전환'이 깔려 있다. 제대로 된 솔루션을 제공하려면 이미 그 업을 해온 업체의 데이터 학습이 필요하다. SK가 아마존과 함께 울산에 데이터센터를 짓는다. 왜 울산일까. 지자체가 강력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지만 핵심은 대형 산업단지다. 중국과의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지금 우리에겐 '산업 전환'으로 경쟁력을 높이는 게 가장 중요하다. 다행히 그 산단에 있는 여러 산업이 지난 수십 년간 데이터를 많이 쌓아뒀다. 그런데 우리 기업이 AI 전환하겠다고 제철·석유화학 등 해당 산업만 가진 고유 데이터를 외국 AI 기업에 맡기면, 우리 산업 경쟁력을 내주는 꼴이다. 외국 AI 기업은 이 데이터로 학습해 적절한 형태의 NPU나 TPU(텐서처리장치)같은 주문형 반도체(ASIC)를 만들어 해당 산업을 키우려는 다른 나라에 패키지 형태로 팔 거다. 이렇게 국내 핵심산업 보호를 위해서라도 소버린 AI가 필요하다. 또 한국의 큰 잠재력 중 하나는 건보공단이나 심평원 등 공공 부문의 막대한 데이터다. 그야말로 보고(寶庫)인데, 개인 정보 보호를 내세워 폐쇄적이다. 영국 바이오뱅크처럼 익명화를 거치고 공공이 철저히 관리하는 식으로 활용법을 찾아야 한다. "

Q : -AI는 엄청난 전력이 필요한데 우리가 감당할 수 있나.
A :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나 제조업의 AI 전환에 따른 전기화, AI 데이터센터 등 수요 폭증을 고려할 때 지금부터 스마트 그리드 투자를 서둘러야 한다. 초기 투자 비용이 막대하다. 대략 앞으로 20년간 매년 10조원씩 총 200조원, 그러니까 과거 KTX와 인천공항을 합한 것보다 훨씬 많이 투자할 생각이 없다면 반도체든 AI든 다 그림의 떡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전력 수급 계획은 원전이냐 신재생이냐 등 발전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전력 관점에서 보면 우린 섬나라다. 만약 주파수가 같은 일본 간사이와 연결하면 서로 전기가 남거나 모자랄 때 양국 모두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 "

Q : -마지막으로, 삼성전자 위기의 핵심은 뭘까.
A : "우선 시대가 바뀌었다. 삼성전자가 잘하던 분야가 과거만큼 고부가가치를 내지 못한다. 둘째, 삼성이 원래 잘하던 기술에서 발생한 착오를 제때 고치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했다. 셋째, 조직이 거대해져 조직 자체가 짐이 됐다. 임직원들은 삼성 공무원화가 됐고, 도전을 장려하고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가 자리 잡지 못해 변화를 두려워한다. 『반도체 삼국지』쓸 때만 해도 불길한 징조는 보였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심각하다. 사실 삼성이나 국내 기업뿐 아니라 모든 산업 전환의 역사를 보면 같은 과정을 겪는다. 일본도 똑같았고, 미국 인텔이 대표적이다. 모바일·GPU 등 큰 세 번의 기회를 놓쳤고, 잘못된 전략을 고칠 생각 대신 땜질 처방만 하다 여기까지 왔다. 국내 기업이 일본의 전철을 밟을까 일말의 불안감이 있어서 반면교사 삼으라고 일본을 공부했는데 결과적으로 따라가고 있는 것 같아 굉장히 걱정이다. "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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