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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매년 10% 경제성장 해냈다…대한민국 기적 만든 그 계획 [창간 60년 연중기획②]

중앙일보

2025.07.01 13:00 2025.07.0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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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구로 수출공단 준공식 모습. 경제개발 계획에 따라 전국에 공업단지들이 조성됐다. 지금 구로공단은 벤처·디지털 단지로 바뀌었다. [사진 국가기록원]
2021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한국을 선진국으로 분류한다고 공표했다. 전쟁을 겪으며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됐던 한국이 약 70년 만에 세계가 인정하는 선진국이 된 것이다. 이런 변화에 성공한 나라는 한국과 대만 정도다. 그래서 한국의 성장은 ‘기적’이라고 한다.

6·25전쟁 마지막 해인 1953년부터 지난해까지 약 70년간 우리 경제는 연평균 6.9%씩 성장했다. 특히 60년대 초부터 97년까지 30여 년 동안은 평균 성장률이 9.4%였다. 30여 년간 매년 10% 가까운 성장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있었다. 때론 빗나가기도 했으나, 이 계획이 한국의 성장 신화를 만든 ‘국가 주도 경제 개발’의 핵심이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직물·합판부터 팔았다, 수출로 ‘잘 살아보세’…선진국 된 한국, 이젠 새 성장법 찾을 때
1979년 온산 동 제련소 준공식 장면.
1961년 5월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경제 발전을 통해 국민을 가난의 덫에서 벗어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에 따라 경제기획원을 설립했고, 그해 9월 경제기획원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하 ‘계획’)을 내놓았다.

수백 쪽에 달하는 1차 계획은 기본적으로 자립 경제 수립을 달성하기 위한 세부 목표와 방안이었다. 당시 우리 경제는 농업이 중심이었다. 제조업의 미발달은 낮은 소득 수준과 극심한 무역적자의 원인이 됐다. 정부는 동시대의 많은 개발도상국처럼 우리가 쓸 공산품을 스스로 생산하는 능력을 갖춤으로써 산업화를 통한 경제 발전과 무역적자를 동시에 해결하고자 했다. ‘계획’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계획을 크게 수정한다. 기대하지 않은 방향에서 무역적자를 해결하고 경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직물·합판 같은 몇몇 제조업 영역에서 급작스레 생산과 수출이 늘어난 결과, 62년 5500만 달러이던 수출이 불과 2년 뒤 1억2000만 달러로 두 배 이상이 됐다. 경제 관료들은 이를 보면서 새로운 경제 발전 전략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소비할 제품을 국내 생산하는 종전의 방식이 아니라, 해외에 판매할 제품의 생산을 늘리는 방향으로다. 공업화의 초점을 수출품 생산에 두고, 수출해서 버는 돈으로 필요한 제품을 수입하는 것이다. 이른바 ‘수입 대체를 통한 자립 경제’로부터 ‘수출 주도 산업화’로의 전략 선회다.

1964년 울산 정유 공장 준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사진 국가기록원]
64년 말 경제기획원은 이런 내용을 담은 1차 계획의 수정안을 발표한다. 이는 이후 우리나라 경제개발의 기본 방향이 됐다. 대한민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수출 주도 경제개발 전략은 박정희 정부가 제창하고 민간을 이끌어간 만큼이나, 민간 영역이 이룬 성과와 잠재력을 정부가 파악하고 수용한 결과였다.

1차 계획 첫해인 62년 90달러(명목액)이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66년에 129달러로 43%가 늘었다. 성과에 고무된 경제기획원은 91년까지 다섯 차례 더 경제개발 계획을 실시한다. 수출은 64년 1억 달러이던 것이 91년에는 674억 달러에 다다랐다. 수출의 폭발적 증대에 힘입어 80년대 중반에는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을 넘어섰고 91년에는 7870달러가 됐다.

1962년 만들어진 경제개발 5개년 1·2차 계획 설명도.
우리나라뿐 아니라 많은 개발도상국이 경제개발 계획을 세웠지만, 성공 사례는 드물다. 북한도 61년부터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을 추진했으나 흐지부지됐다. 사실 ‘수출 주도’는 한국이 성공한 요인 중 하나였다. 공업화를 지향하는 개발 계획을 수립했던 많은 개도국은 목표 생산량을 달성했는지를 따졌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통계 왜곡이 일어났다. 지표상으로는 성공했지만, 실제는 생산이 이뤄지지 않는 일이 빈번했다. 반면에 수출 통계는 수입국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정보이다 보니 조작이 거의 불가능했다.

산업을 자급형에서 수출형으로 바꾼 것처럼, 융통성 있게 전략을 수정한 것도 성공의 요인이라 하겠다. 73년 발표된 중화학공업화 정책 또한 계획에 없는 것이었다. 수출 지향으로의 전환만큼이나 한국 경제 발전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엄청난 기획이었지만, 73년 전격적으로 발표했을 뿐 경제개발 계획을 통해 공표한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경제개발 계획은 엉성하기도 했다. ‘계획을 잘 짜고 집행하는 것’이 ‘계획한 바에 따라 경제성장을 차근차근 진행한다’는 의미라면, 경제개발 계획은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경제성장률 같은 목표치가 늘 상정한 것을 훨씬 초과 달성했기 때문이다.

국민들 이 경제개발 계획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1962년 서울 세종로에 모형전시관을 세웠다. [사진 국가기록원]
경제의 큰 줄기나 구조적 변화를 제시하는 측면에서도 미흡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출 주도 경제성장’이라는 정책 방향은 정부가 선도적으로 내놓은 것이라기보다 일종의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결과에 가까웠다. 성장 속도를 적절히 조절하지도 못했다. 경기 과열로 수많은 부실기업이 생겨나는 바람에 정부는 72년 모든 사채를 동결하는 초헌법적인 조치(8·3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제6차 계획이 끝나던 91년 이후 정부는 더는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지 않았다. 94년에는 재무부와 통합해 재정경제원을 만드는 방식으로 경제기획원을 없앴다. 경제가 일정 수준에 도달한 상황에서는 국가가 계획을 통해 경제를 이끌어가는 방식이 효과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판단이었다.

그러고 30년이 흐른 지금도 정부의 경제 운영이 개발연대 방식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큰 힘을 휘두르던 과거를 잊지 못한 경제 관료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경제를 운용하지 않는 탓일 수 있다. 하지만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여기저기서 “정부가 조처해야 한다”고 타박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야말로 정부가 개발연대식 정책을 버리지 못하는 진짜 이유일는지 모른다.

◆김두얼 교수=경제사학회장이다. 경제사와 제도경제학 분야를 연구했다. 책 읽는 문화를 퍼뜨리기 위해 계간 서평 전문지 『서울리뷰오브북스』 편집위원장도 맡고 있다. 저서로 『한국 경제사의 재해석』 『경제성장과 사법정책』 『살면서 한번은 경제학 공부』 등이 있다.
김두얼 명지대 경상통계학부 교수
2시간 듣고 10분 총평, 현장 의견 적극 수용…박정희의 ‘경제 리더십’
대통령 주관한 ‘수출진흥확대회의’
수출 주도 성장으로 정책을 선회한 뒤, 정부는 국무총리가 주관하는 수출진흥위원회를 만들었다. 1965년부터는 여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다. 시간이 흐르며 정부 부처는 물론 민간의 주요 수출 기업이나 단체들도 참여하게 됐다. 그러면서 이름이 ‘수출진흥확대회의’로 바뀌었다. 70년대에는 참가자가 200여 명에 달했다.

회의는 거의 매달 정기적으로 열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개근하다시피 했다. 이는 대통령이 이 회의, 나아가 수출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준다. 회의 다음 날에는 거의 모든 신문이 1면에 내용을 상세히 소개했다. 확대회의가 수출 현황과 관련 정책의 방향을 온 국민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박경민 기자
회의는 상공부 장관의 사회로 보통 두 시간가량 진행됐다. 수출 현황에 대한 상공부 보고, 국제 정세 및 시장 동향에 대한 외교부 보고가 1시간30분가량을 차지했다. 이후 질의응답 시간에는 질문이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미리 짠 문답이 10분 정도 오가는 게 대부분이었다.

비록 회의에서 활발한 의견 개진이나 토론이 없었지만, 준비 과정에서는 정부와 민간 간에 다양한 정보와 의견이 교환됐다. 회의에서 대통령에게 성과를 보고하려면 담당 공무원들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어느 신문 기사는 “확대회의를 준비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담당 공무원의 푸념을 전하기도 했다. 결국 확대회의는 호수 위를 노니는 우아한 백조이고, 백조가 떠 있을 수 있도록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발과 같은 공무원과 민간의 노력이 수출 증대와 경제 발전을 가져온 셈이다. 인상적인 점은 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역할이다. 통상 마무리 발언 정도만 했다. 그것도 10분을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박 대통령은 65년부터 회의에 빠짐없이 나왔기에, 70년대가 되면 가장 오래 참석한 인물이 됐다. 아울러 회의 외에도 수출과 관련한 수많은 보고를 받았을 것이므로, 누구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터다. 그런데도 자기 생각을 쏟아내지 않았다. 이런 자세가 공무원들로 하여금 스스로 일하도록 만들어 수출 정책을 체계적으로 마련하고 집행하는 기반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확대회의는 박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 몇 년간 명맥을 이어가다 80년대 중반엔 완전히 중단된다. 30년 동안 잊혔던 회의는 박근혜 대통령 때 다른 모습으로 부활한다. 집권 초기부터 주재한 ‘규제개혁회의’다. 회의는 생방송으로 전 국민에게 공개했다. 여러 면에서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전범 삼아 만든 것이 명확했다.

그러나 외모만 유사할 뿐, 중요한 부분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회의 내내 주로 듣고 마지막에 총평을 한 데 비해, 박근혜 대통령은 회의 절반을 자신의 발언으로 채웠다. 수많은 전문가의 의견을 경청하는 지도자와 자기 생각을 지시하는 데 바쁜 지도자가 대비됐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경제 성과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해하고 계승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새겨야 할 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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