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주도 성장으로 정책을 선회한 뒤, 정부는 국무총리가 주관하는 수출진흥위원회를 만들었다. 1965년부터는 여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다. 시간이 흐르며 정부 부처는 물론 민간의 주요 수출 기업이나 단체들도 참여하게 됐다. 그러면서 이름이 ‘수출진흥확대회의’로 바뀌었다. 70년대에는 참가자가 200여 명에 달했다.
회의는 거의 매달 정기적으로 열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개근하다시피 했다. 이는 대통령이 이 회의, 나아가 수출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준다. 회의 다음 날에는 거의 모든 신문이 1면에 내용을 상세히 소개했다. 확대회의가 수출 현황과 관련 정책의 방향을 온 국민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회의는 상공부 장관의 사회로 보통 두 시간가량 진행됐다. 수출 현황에 대한 상공부 보고, 국제 정세 및 시장 동향에 대한 외교부 보고가 1시간30분가량을 차지했다. 이후 질의응답 시간에는 질문이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미리 짠 문답이 10분 정도 오가는 게 대부분이었다.
비록 회의에서 활발한 의견 개진이나 토론이 없었지만, 준비 과정에서는 정부와 민간 간에 다양한 정보와 의견이 교환됐다. 회의에서 대통령에게 성과를 보고하려면 담당 공무원들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어느 신문 기사는 “확대회의를 준비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담당 공무원의 푸념을 전하기도 했다. 결국 확대회의는 호수 위를 노니는 우아한 백조이고, 백조가 떠 있을 수 있도록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발과 같은 공무원과 민간의 노력이 수출 증대와 경제 발전을 가져온 셈이다. 인상적인 점은 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역할이다. 통상 마무리 발언 정도만 했다. 그것도 10분을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박 대통령은 65년부터 회의에 빠짐없이 나왔기에, 70년대가 되면 가장 오래 참석한 인물이 됐다. 아울러 회의 외에도 수출과 관련한 수많은 보고를 받았을 것이므로, 누구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터다. 그런데도 자기 생각을 쏟아내지 않았다. 이런 자세가 공무원들로 하여금 스스로 일하도록 만들어 수출 정책을 체계적으로 마련하고 집행하는 기반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확대회의는 박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 몇 년간 명맥을 이어가다 80년대 중반엔 완전히 중단된다. 30년 동안 잊혔던 회의는 박근혜 대통령 때 다른 모습으로 부활한다. 집권 초기부터 주재한 ‘규제개혁회의’다. 회의는 생방송으로 전 국민에게 공개했다. 여러 면에서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전범 삼아 만든 것이 명확했다.
그러나 외모만 유사할 뿐, 중요한 부분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회의 내내 주로 듣고 마지막에 총평을 한 데 비해, 박근혜 대통령은 회의 절반을 자신의 발언으로 채웠다. 수많은 전문가의 의견을 경청하는 지도자와 자기 생각을 지시하는 데 바쁜 지도자가 대비됐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경제 성과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해하고 계승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새겨야 할 점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