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가 한국 공연계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숏폼’으로 대표되는 자극적인 콘텐트가 범람하는 시대에도 보편성을 갖춘 대문호의 작품이 통하고 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 작품 속 이야기의 힘이 다양한 변주를 가능토록 하며 고전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오래된 이야기? 지금의 이야기!”=지난 5월 10일 서울 서강대 메리홀에서 개막해 7월 20일까지 이어지는 연극 ‘킬링시저’는 셰익스피어의 고전 ‘줄리어스 시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브루투스 너마저”로 유명한 고대 로마 시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영어 명칭 줄리어스 시저) 암살 사건 이후 벌어지는 혼란상을 담았다.
이 연극은 공교롭게도 계엄과 탄핵, 조기 대선 등 어수선했던 한국 정치 상황과 맞물려 이목을 끌었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에 따르면 6월 한 달간 티켓예매액에서 연극 부문 3위를 기록했다.
김정 연출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지금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단순한 정치 암살극을 넘어 인간의 본성과 윤리적 갈등, 권력의 위험성 등 보편적 주제를 담은 원작을 씨앗으로 현대에 맞는 해석을 더 했다. 원작은 시저 암살 전까지 많은 분량을 담았지만, ‘킬링시저’는 암살 장면을 극 초반부에 배치했다. 각본을 쓴 오세혁 작가는 “시저를 암살한 이들이 어떤 이전 투구를 벌이는지 자료와 상상력을 동원해 풍부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시공을 넘어 통하는 ‘풍자’=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의 ‘킬링시저’와 달리 연극 ‘십이야’는 웃고 즐길 수 있는 희극이다. 6월 12일~7월 6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동명 희극이 원작. 일란성 쌍둥이 남매를 중심으로 네 사람의 뒤엉킨 사랑이 제자리를 찾는 과정을 담은 원작의 뼈대는 그대로 유지한 채 배경을 조선 시대로 옮겼다.
원작에 담긴 지배 계층에 대한 풍자와 해학도 살렸다. 가령 원작에서 “어리석은 현인보다 재치있는 바보가 낫다.”(Better a witty fool than a foolish wit)라는 대사는 “똑똑한 바보가 멍청한 위정자보다 백 배 낫다”로 변형됐다. 임도완 연출은 “우리 전통 탈춤에 양반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내용이 있는 것처럼, 셰익스피어의 ‘십이야’ 당시에도 극 중 상전에게 대거리를 하는 광대 짓을 보고 그간 쌓였던 서민의 스트레스가 풀렸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관객의 입·퇴장이 자유롭고 무대 조명을 어둡지 않게 유지하는 ‘열린 객석’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유도했다. KOPIS 집계 6월 연극 부문 티켓 예매액 8위에 올랐다.
◆다양하게 ‘셰익스피어 다시 보기’=셰익스피어 사후 45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의 작품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있다. 올여름 국내 관객은 대문호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를 ‘논버벌’(non-verbal·비언어) 공연으로 만날 수 있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없앤 파격적인 동선으로 알려진 ‘슬립노모어’다. 보는 이들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스토리 전개로 평론가들 및 대중의 호평 속에 세계적인 팬덤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에 처음 선보이는 이 작품은 7월 24일~8월 9일 서울 매키탄호텔에서 프리뷰 공연이 진행되며 8월 21일 공식 개막한다.
‘셰익스피어’라는 인물이 소재가 된 작품도 있다. 6월 연극 부문 티켓 예매액 1위를 기록한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7월 5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관객을 만난다. 이 작품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셰익스피어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지난 1999년 아카데미상 작품상 등 7관왕을 기록한 동명의 영화가 원작으로 2014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초연했다. 한국에선 지난 2023년 첫선을 보였다.
한국셰익스피어학회장을 지낸 이현우 순천향대 영미학과 교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신질서와 구질서가 대립하고 번영과 혼돈이 공존하던 시대, 무엇보다 인류의 첫번째 세계화 시대를 배경으로 탄생했다”며 “이런 배경이 작가의 천재적인 필력과 어우러지며 시대와 지역의 경계를 넘어 인간과 세상에 대한 보편성을 갖게했다”고 말했다. 이어 “급격한 변화와 혼돈이 이어지는 21세기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더 큰 공감을 얻으며 일종의 문화 보편어로 기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